‘월급으론 못 살아’… 코인·도박·사치, 빚의 끝에서 본 한국 [이슈&탐사]
빚을 동반한 무리한 투자, 수입을 초과한 소비의 마지막 장면은 종종 호화로운 식당과 백화점이 아닌 법원에서 펼쳐진다. 채무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진 이들이 법원에 개인파산‧회생을 신청해 빚 탕감을 호소하는 것이다. 법원은 채무자의 진술과 변제계획을 중심으로 그의 과거 행적에 불법적이거나 건전한 경제관념에 반하는 행위 등이 있었는지까지 종합적으로 따진다. 이후 최종적으로 면책 여부를 결정한다. 면책 결정을 고지받을 때, 채무자의 얼굴에선 빛이 난다고 한다.
사치와 코인, 토토
법원 문턱에 이르는 변제불능 사태 모두를 곧장 부도덕한 행위로 낙인찍긴 곤란하다. 채무누적 과정에는 불의의 사고, 가족의 실직, 보이스피싱 피해를 포함한 다양한 사연이 들어 있다.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기보다 도산제도를 통한 구제로 노동력 사장을 막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란 판단은 일반화돼 있다. 파산·회생이 가장 활성화된 나라는 보수적 시장경제를 운용하는 미국이다.
다만 빚의 끄트머리를 지켜보는 이들은 법원 밖 세상의 변화를 우려하고 있다. 저축의 가치가 떨어지고 소비 수준이 사람을 설명하는 세상이 됐다는 것, 양극화와 경기침체가 심화한다는 것, 이런 외부환경과 슬기롭지 못한 개인의 선택이 뒤엉키는 때가 많아졌다는 것 등이다. 부양가족이 없거나 적을 20대 젊은이들이 점점 많은 빚을 지고 탕감을 요청한다는 점도 좋은 신호가 못 된다. 서울회생법원에 따르면 ‘30세 미만 청년’의 개인회생 신청 비중은 2020년 10.7%, 2021년 14.1%, 지난해 15.2%로 꾸준히 커졌다.
개인회생에 이르는 빚의 동기들을 ‘명품 소비’ ‘투자실패’ 따위로 명확히 계량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적잖은 채무자들은 법원에 나쁜 인상을 남길 것을 우려해 빚을 못 갚게 된 요인을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최초 진술서부터 회생위원들의 검토, 법관의 판단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새로운 행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임계점을 넘긴 지출이 과연 고급식당 때문인지 자녀 학원비 때문이었는지 잘라 말하기 어려운 때도 있다. 결국 변제불능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요인의 결합인 형태가 많다.
명확한 통계가 없을 때, 채무자의 재산‧소득을 조사하고 변제계획안을 검토하는 회생위원들의 경험은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서울회생법원 외부회생위원인 김동영 변호사는 ‘수입에 비해 과도한 지출을 하는 사례’가 20%, ‘주식 및 가상자산 투자 실패로 인한 사례’가 20~30%, ‘온라인 도박 등 불법적 투자와 관련된 사례’가 20%가량이라고 가늠했다. 그는 특히 ‘과도한 지출’ 부분에서 고액 사교육을 둘러싼 현실도 엿보인다고 했다. 수입 범위를 넘어선 카드빚으로 유명 학원에 돈을 내는 모습이 다수 발견된다는 것인데, 이 변제불능 사태들은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한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서울회생법원 내부회생위원인 송인원 법원사무관도 ‘가상자산 및 주식 투자 실패 사례’를 20%, ‘스포츠토토 등에 따른 사례’를 20%가량으로 헤아렸다. 송 회생위원은 ‘일반적이지 않은 소비 행태’가 40~50%가량의 비중으로 변제불능 사태의 기저를 이룬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가 설명한 ‘일반적이지 않은 소비 행태’에는 꼭 사치나 과소비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특이한 모습들이 포함된다. 빚을 진 상태에서의 잦은 택시 이용, 인터넷 방송에서의 수백만원대 ‘별풍선’ 후원, ‘반복적인 굿’ 등이 조사된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사례들은 때로 투자실패 등 다른 요인과 결합되기도 한다.
일부 채무자는 면책이 되지 않을까봐 처음에는 ‘명품’ 구매나 거듭된 성형수술 따위를 진술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출 내역들은 이후 금융계좌를 조사할 때 드러난다. 본인과 배우자의 수입을 초과한 쇼핑을 계속하는 사례, 신용카드만 믿고 해외여행을 계속 나가는 사례, 수입차를 거듭해 바꾸는 사례 등이 발견된다. 채무자들은 소비 습관이 잘못됐다며 참회의 진술서를 써내는데, 일부는 법원 절차 진행 중에도 쇼핑과 온라인 도박을 계속하다 적발된다. 드물게는 채무자가 회생으로 부담을 던 뒤 ‘인가축하금’이라며 추가 대출을 받는 사례도 발견되는데, 이런 기회주의적 태도를 접하면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는 게 법원 관계자들의 경험담이다.
양극화와 경기침체, 빚 권하는 사회
사치‧낭비성 행위의 비중은 과거와 비슷한 편이다. 회생위원들의 체감 속에서 비중이 커지는 변제불능 동기는 단연 가상자산과 주식 투자의 실패다. 이는 기본적으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투자행위 자체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데, 궁극적으로 양극화와 경기침체를 반영한다. 김 회생위원은 “젊은이들이 ‘월급으론 뭘 믿을 수 없다’ 싶어서 가상자산 등 투자에 큰 관심을 갖는 듯하다”고 말했다. 과거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획득하는 일은 어려워졌고, 그나마 임금으로 집값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누군가가 큰 돈을 쉽게 벌었다는 이야기들은 온라인에 넘치는 환경에 청년들이 놓였다는 얘기다.
회생법원에서 보이는 쓸쓸한 풍경 가운데 하나는 가계부채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자영업자들의 폐업 사례다. 김 회생위원은 이 부분 역시 개인회생 사건들의 30%가량을 이룬다고 본다. 은퇴 이후 새로운 출발에 나선 중년과 창업 청년 등 자영업자들은 사무실‧상점의 보증금과 인테리어 비용을 대개 빚으로 부담한다. 자영업자들의 도전은 가상자산 투자보다는 승률이 높은 것이지만, 은행의 사업자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갚을 만큼 성공하는 이는 적다. 김 회생위원은 “돈을 버는 이들은 10~20% 정도이고, 약 70%는 실패하는 듯했다”고 말했다.
채무자들의 빚 탕감 요청은 사회적으로 따뜻한 시선을 받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채무자가 이익을 얻고, 손실은 채권자가 부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채권자집회에서는 돈을 떼일 처지가 된 이들의 울분이 크게 토로되기도 한다. 다만 우리 경제 자체가 가계부채를 통해 성장해 왔다는 점, 채무자의 신속한 경제활동 복귀가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점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져 있다. 한 수도권 부장판사는 “파산‧회생제도는 ‘감기’가 온 나라의 ‘폐렴’으로 진행되지 않도록 막자는 것이며, 모두의 피해를 막는 과정에서 선량한 손해와 양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불성실한 이들이 제도를 활용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히려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말했다.
낭비성 소비와 무리한 투자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별개로 회생 사례는 꾸준히 늘고 있다. 국가가 개인의 유혹‧위험 노출을 막을 수 있는 조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독적 행위의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기에는 채무자들을 부추겨 이익을 거두는 구조 역시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포통장을 동반한 불법적인 온라인 도박은 좀체 근절되지 않으며 ‘손쉬운 대출’ 광고는 온갖 수단으로 사람들을 향한다. 쉽게 많이 탕감받을 기술이 있다고 속삭이는 회생브로커도 있고, 법률사무소들은 변제율 하향 사례를 실적처럼 제시한다. 청년들은 이제 “빚 못 갚으면 회생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법관으로 개인파산‧회생 사건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서정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온라인을 통해 접근이 용이한 행위의 경우, 이를 개인의 의지에만 맡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특히 온라인 도박의 경우 도박장의 개설행위나 도박행위는 형사상 범죄에 해당하고, 그에 이용되는 대포통장의 제공행위 역시 전자금융거래법위반죄를 구성한다”며 “온라인 도박에 노출되는 기회가 제한되도록 형사적 규제 등 사회적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고 했다.
이슈&탐사팀 정진영 김지훈 이택현 이경원 기자 young@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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