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선] 사교육 안해도 대학 가는 나라, 국민 숙원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대선 후보 시절 “수능에서 사교육 의존도 높은 초고난도 문항(킬러 문항)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옳은 방향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해법과도 차이가 없다. 그런데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킬러 문항 폐지에 나서자 자신들이 공약했던 사실조차 잊고 ‘최악의 참사’라고 한다. 제 얼굴에 침 뱉기인데, 이런 지적에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킬러 문항 하나로 대입 당락이 정해지니 사교육 광풍이 극에 달했다. 지난해 사교육비는 국내 총생산(GDP) 2162조원의 1.2%인 26조원에 달했다. 삼성전자 연구개발비(25조원)보다 많다. 초중고생 10명 중 8명이 매달 40만원 넘게 쓰며 사교육을 받는다. 자녀 1명당 직장인 월급의 11.6%가 사교육에 들어가니 대기업 간부, 고위직 공무원도 허리가 휘어 부인들이 파트타임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게 현실이다. 그 덕분에 대치동 스타 강사들은 320억원 짜리 논현동 빌딩, 250억원 짜리 청담동 아파트 분양권을 대출 없이 사들이고 1억원 넘는 명품 시계를 차고 다닌다. ‘수험생 자녀 둔 죄’로 수입의 태반을 뜯기는 국민의 피눈물로 누리는 대가다. 30년 경력의 학원 강사에게 “대통령이 지시해도 안 사라지는 킬러 문항의 존재 이유”를 물어봤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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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킬러 문항 하나가 당락 정해서야
9월 모의평가부터 폐지가 마땅
야당도 대선 때 공약하지 않았나
」
“수능 과목이 너무 적다. 국·영·수에다 사회(문과), 과학(이과) 각 2개씩 총 5개뿐이다. 범위도 좁다. 수학은 이과생조차 미적분 안 해도 된다. 또 영어는 어릴 때부터 학원 다닌 아이들이 많아 다들 잘한다. 그러니 4개밖에 안 되는 과목에서 변별력을 확보하려고 대학교수도 풀기 어려운 고난도 문제를 내는 거다. 국어 시험에 자기 자본과 바젤 협약 등 경제 전문 용어가 등장하고, 화학 시험에 이중 삼중으로 꼬인 연립 방정식 문제가 나오고, 생물 시험에 경우의 수를 여러 번 돌려야 답이 나오는 ‘유전 통계학’ 문제가 나오는 이유다. 아인슈타인급 천재가 아니면 이런 킬러 문항을 주어진 시간 안에 풀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문제 하나를 못 풀면 서울대 갈 학생이 연고대 가게 될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다 보니 사교육 시장에서 이런 ‘킬러 문항’을 잡아준다는 ‘일타 강사’들이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지금 사회 주도층인 586세대가 대입 고사를 치르던 시절엔 수험 과목이 10개 안팎에 달했고 그만큼 변별력도 높았다. 따라서 시험 문항도 공교육 범위 안에서 출제됐다. “과외 안 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풀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했던 이유다. 그러나 지금은 수험 과목과 범위가 반 토막으로 줄면서 수험생 혼자 아무리 공부해도 못 푸는 킬러 문항이 당락을 결정하게 됐다. 필연적으로 사교육 수요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킬러 문항 풀이에 강한 ‘스타 강사’ 가 사교육 시장의 지존이 됐다는 것이다.
돈 많은 스타 강사들은 ‘킬러 문항’을 개발하는 연구진을 여러 명 거느리는 등 ‘기업’이 된 지 오래다.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강사들은 킬러 문항을 개발하는 프리랜서들에게 문항당 수십만원씩 주고 사서 공부한 뒤 학생들을 가르친다. 강사당 연간 킬러 문항 구입비가 1억원을 넘나든다. 그 비용은 학부모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킬러 문항 특강 한번 받는 데 100만원이 드는 이유다.
킬러 문항이 판을 치게 된 원인인 수능 과목 축소는 당초 “사교육을 죽이고 아이들 수험 부담을 덜어 주자”는 포퓰리즘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변별력이 감소하자 ‘킬러 문항’으로 상쇄한 결과 사교육이 오히려 기승을 부리는 역설이 나온 것이다.
답은 하나다. 사교육을 줄이려면 오는 9월 수능 모의 평가부터 킬러 문항을 없애야 한다. 과외 안 해도 열심히 공부하면 합격하는 현실을 만들어줘야 사교육이 줄어들 것 아니겠는가. 이로 인해 야기될 변별력 감소는 수험 과목과 범위 확대 등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학벌이 취업과 결혼에 미치는 영향이 유독 크다. 어느 대학 출신이냐가 개인의 평생을 좌우하는 ‘분배’의 핵심인데, 킬러 문항이 대입 당락을 결정하니 사교육비를 못 내는 빈곤 가정 자녀는 신분 상승 기회가 원천 봉쇄되고, 자녀 사교육에 월급을 바치는 직장인들은 중산층에서 탈락하며, 청년들은 출산과 결혼을 꺼리는 ‘헬조선’이 되고 말았다.
‘사교육 대신 공교육만 받고 대학 갈 수 있는 나라’는 좌우를 떠나 온 국민의 숙원이다. “아이들 배운 범위에서만 수능 문제 내라는 게 뭐가 잘못인가?” “강사들 밥줄 끊길까 봐 옳은 일 하는 정부 비판하냐.” 이런 글이 야권 성향 학부모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현실을 민주당은 직시해야 한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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