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미군정 앞에 당당했던 여운형
이념의 대립이 날카로운 지금 여운형(1886~1947)을 평가하는 일이 쉽지 않지만, 그는 빼어난 인물이었음이 틀림없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학식이 높고, 언어에 능통했고, 운동에 소질이 있어 초대 대한체육회장을 지냈다. 그 시대에 시국을 읽는 데 가장 뛰어났다. 그런 점에서 그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다. 다만 판(判)에 대해서는 다르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여운형은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어느 때는 일을 벌여 놓고 수습하지 못했다. 이럴 경우에는 참모를 잘 둬야 하는데, 그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믿고 의지하던 동생 여운홍(呂運弘)마저 형을 버렸을 때 그는 의지할 곳 없이 무너졌다. 어쩌면 그의 박덕(薄德)한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다.
미군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은 패망하면서 여운형에게 거금을 주고 구명도생(苟命圖生)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하지(J R Hodge)는 여운형을 차기 집권자로 구상했다. 하지는 여운형이 ‘매우 유능한(immense capability)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는 여운형을 군정청 고문으로 내정하고 그를 초치했다. 그랬더니 여운형이 답변서를 보내 “내가 인민공화국을 세웠으니 (우리가 집권하고) 군정이 우리 고문이 돼야 하는데 이번 일은 주객이 뒤집힌 것”이라며 가지 않았다. 군정청을 기웃거리며 뭔가 한자리 얻으려고 기신거리던 세태를 고려하면 그는 이 점에서 다른 정치인과 달랐다.
요즘 주한 중국 대사가 야당 대표를 불러 훈계한 사건이 세간의 화제다. 불려가서 한 끼 식사 대접받고 사진 찍으면 자신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 판단은 틀렸다. 여운형처럼 “당신이 오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지금이 노론(老論)의 시대도 아닌데….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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