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240, 명품은 1년에 1억… 나는 금수저 아닌 중산층” [이슈&탐사]

정진영,이택현,김지훈,이경원 2023. 6. 2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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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올에만 5000만원…우리집은 중산층
지난 15일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에 고급 외제차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한형 기자


1~2주에 한 번 200만원가량의 ‘명품’을 구매한다는 A씨는 국민일보에 본인의 지난해 현대카드 사용 내역을 보내왔다. 연간 결제액과 소비처를 묻는 취재진의 요청에 그는 거리낌 없이 카드 사용 내역을 공유했다. 그가 1년간 갤러리아 명품관에서 1290만원,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서 1280만원, 크리스찬디올 성수에서 1235만원 등을 쓴 내역이 기록돼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명품 소비 목적을 ‘선물’, 결과를 ‘행복’이라 설명했다. A씨는 “명품 구매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편견이 심어지도록 임의로 곡해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명품에 1억, 그래도 “소소한 편”

A씨가 되돌아본 그의 지난해 명품 브랜드별 지출 금액은 ‘디올’에 5000만원, ‘프라다’ ‘발렌시아가’ ‘에르메스’ 등 기타 브랜드에 3000만~4000만원이었다. 그가 가장 즐겨 산 품목은 니트였는데 옷장에 구비돼 있는 것만 2000만~3000만원어치라고 했다. 그는 고가의 의류와 구두, 지갑 등을 구매하는 것 이외에도 호텔 숙박(호캉스)을 즐겼다. 그는 자신이 돈을 쓰는 품목과 목적, 감상을 블로그에 꼼꼼히 소개하고 있다.

그가 명품 구매를 즐기게 된 계기는 2년 전 취업 직후 240만원가량의 프라다 서류가방을 산 경험이었다. 단숨에 당시 그의 월급만큼을 지출한 것인데, 정작 본인은 학창시절 포기한 것들을 보상받는다는 생각에 기뻤다고 한다. 그는 “어렸을 적 행복하지 않았던 기억들에 대한 반발, 그에 대한 보상심리가 컸던 것 같다”며 “그때부터 스스로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A씨는 이후 “나는 이 정도 되는 선물을 받아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다 한다.

240만원가량의 월급을 받는 그가 명품에 연 1억원에 가까운 돈을 지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부모님의 지원이다. 오피스텔 월세와 관리비, 생활비를 그의 어머니가 대준다고 한다. 그는 월급을 크게 웃도는 금액을 소비했고 카드 대금이 밀리면 어머니에게 ‘SOS’를 청하기도 했다. 부모님의 지원은 ‘여유자금’으로 분류됐다. 그는 대출로 명품을 사는 것은 사치·허영이라 여겨 허용하지 않으며, 월급이 줄어드는 느낌이 싫어 할부도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찾은 시민들이 ‘샤넬’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한형 기자


A씨는 “나는 금수저는 아니고, 조금 살만한 중산층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른 명품 구매자들을 보면 저는 소소한 축인 것 같다. 저는 디올의 소소한 VIP(귀빈)”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A씨는 “(소비 패턴을) 오래 유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20대까지는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디올은 VIP 등급의 구매액 기준을 묻는 국민일보 문의에 “양해의 말씀을 전한다”며 답하지 않았다.

아들의 연 1억원 명품 소비를 지원하는 가족을 중산층으로 분류하긴 아무래도 어렵다. 올해 4인 가구 중위소득은 월 540만원 수준이다. 다만 “나를 위한 삶을 살겠다”며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는 A씨의 태도만큼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 아니고, 명품을 파는 기업과 백화점들의 영업 전략과 정확히 일치한다. 기업들은 “한국은 명품에 대한 인식이 나쁘지 않다” “명품을 사는 한국인은 연령층이 다양해졌고, 특히 MZ세대가 소비의 한 축이 됐다”고 한국인의 구매력과 성향을 평가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가 분석한 지난해 한국의 명품 구매력은 연 19조원 수준인데, 세계 7위다. 유로모니터는 한국에서 “명품 소유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졌다” “온라인 구매처가 확대됐다”고 말한다. ‘샤넬’ 등 명품 브랜드들은 미성년자인 한국 연예인들에게도 ‘앰버서더’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명품 브랜드의 이름을 꿰게 된 건 그 결과다. ‘펜디’ 등 명품 브랜드 업체 여러 곳에서 근무했던 B씨는 “세계 시장 가운데 한국의 매출을 본 본사가 매우 놀랐었다”며 “한국지사 근무 인원을 늘리는 등 ‘대우’가 달라졌다”고 최근의 추세를 말했다.

명품 브랜드들은 제품 분야를 초월해 한국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유명 레스토랑과 제휴한 ‘팝업 스토어’도 유행을 탔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 ‘이코이 엣 루이비통 인 서울’은 평일 점심에도 14개 테이블 가운데 10개가 차 있었다. 20~30대 젊은층이 절반가량이었다. 천만원대 조형물 십여개가 천장에 달리고 접시와 수저가 명품인 이 식당의 1인당 식사 비용은 점심 기준 25만원, ‘티 세트’를 추가하면 35만원이다. 방문객들은 식사 전후로 ‘루이비통’ 제품을 쇼핑하기도 하는데, 다른 지점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 전시돼있다. 직원은 “700만원대 가방이 잘 팔린다”고 말했다.

최근 수년간의 초고가 소비 증가는 코로나19 국면에서 해외여행 위축에 따른 반사 효과로 설명됐었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이 같은 ‘보복 소비’로만 설명되지 않는 소비 성향이 드러난다. 연초부터 이달까지의 해외여행 인구는 약 2700만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국제선 이용 고객(395만명)의 7배가 됐다. 카드결제액 등 빅데이터를 활용한 컨설팅 기업 나이스지니데이타에 따르면 올 1분기에는 2019년 1분기와 비교해 1000만원 이상의 가방, 500만원 이상의 시계·귀금속 등 초고가 소비 비중이 늘었다.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이코이 엣 루이비통 인 서울’의 내부 모습. 정진영 기자

사라진 저축, 생겨난 신분

경기둔화로 인한 소비 양극화 속에서 초고가 소비의 오름폭이 점점 커진다는 점은 명확하다. 전문가들은 일단 초고가 소비의 새 동력이 ‘집값’ 선택지의 배제에서 왔다고 풀이한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집이 ‘넘사벽’이 되면서 저축 요인이 떨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초고가 소비 증가의 근저에는 비싸진 집값과 달라진 결혼 문화가 있다는 분석이었다.

주택을 살 필요가 없거나 살 수가 없어서 손에 쥐어진 자금은 현시적 소비와 결합하고 있다. 명품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쯤은 가져야 할 신분증이 되고 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저축을 해도 주택이나 차량의 구매는 힘들어지는데, 명품은 가격이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본인의 가치 상승에 기여한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중고명품업체 사장은 “요새는 생활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명품을 2개 이상은 다 가지고 있다”며 “고객들이 만나는 계층에 따라 다른 것을 들고 나가기 위해 가격대별로 구비하더라”고 말했다.

명품을 중심으로 한 현시적 소비 경향 속에서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묘한 시각차가 발견된다. 국민일보는 명품 구매 경험이 있는 65명을 대상으로 자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들은 본인이 명품을 구매한 경우에는 “내 만족감을 위해 산 것”이라고 응답(64.6%)했지만, 타인이 명품을 구매한 경우에 대해서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 산 것”이라고 응답(70.8%)했다. 자기만족과 타인의 시선은 실은 구별되지 않는 것에 가깝다. 현대사회를 ‘소비사회’로 규정한 김경자 가톨릭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자기만족으로 소비했다는 경우에도, ‘왜 만족하느냐’를 물으면 ‘남들 보기에 떳떳하고 당당하니까’라는 답이 돌아온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펜디' 매장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한형 기자


국내여행 대신 해외여행을 택하고, 평일엔 편의점 도시락을 먹어도 주말엔 ‘오마카세’를 즐기는 이들이 늘어 간다. 일부러 가품을 사는 이들도 전보다 많다는 것이 명품을 파는 이들의 말이었다. 이러한 소비 변화의 근원에 과시욕 영향이 큰지 소득-자산 격차에 질린 환경 탓이 큰지 쉽게 말하긴 어렵다. 분명한 것은 초고가 소비엔 개인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얽혀 있으며,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두 요인 모두가 실시간으로 부추겨진다는 점이다. 정태성 행동경제학연구소 대표는 “나의 일부분만 편집해 올려줄 수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호화로움에 대한 과시가 더욱 발현된다”고 분석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결국 다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다 분명한 것은 소비의 양극화 심화가 한국 경제에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니라는 점이다. 개별적으로 정당한 초고가 소비들은 공동체 차원에서는 박탈감을 남기며, 이 때문에 특히 청년의 위험자산 투자와 무기력증 등 여러 부작용이 야기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소비 양극화 심화로 소비력이 부족한 계층에서는 박탈감이 커지고, 결국 행복지수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개인으로서는 합리적인 소비겠지만 사회적으로는 건설적이지 못하다. 중산층이 몰락하는 과정이 정확히 이렇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정진영 이택현 김지훈 이경원 기자 young@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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