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완규의한·미동맹사] 6·25전쟁 발발과 트루먼 美 대통령의 참전 결정

2023. 6. 1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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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미국은 한국을 방어할 법률적 책무는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 3일째인 6월27일 제2차 NSC를 열고 미 해·공군의 한국군 지원과 제7함대의 대만해협 봉쇄를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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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하였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맥아더는 “만약 한국이 공산당에게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으면, 나는 한국을 캘리포니아주와 마찬가지로 방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미국은 한국을 방어할 법률적 책무는 없었다. 미 극동사령부 역시 북한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일어나자 사태가 심각해졌다. 고향 미주리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다 전쟁 소식을 들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급히 돌아와 첫 긴급 국가안보회의(NSC)를 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참석자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정책 목표를 또 다른 세계대전 예방에 두었다. 북한의 침공은 독립국가에 대한 공산당의 전복 시도 행위이며 나아가 침략과 전쟁임이 명백하다고 인식하고 신속한 참전을 결심했다. 전쟁 발발로부터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1950년 7월2일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부대.
공군과 해군 정도만 지원하면 북한 침략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지상군 참전은 고려하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 3일째인 6월27일 제2차 NSC를 열고 미 해·공군의 한국군 지원과 제7함대의 대만해협 봉쇄를 명령했다. 그러나 “38선 이북으로 군사행동이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며 작전지역을 38선 이남으로 한정했다.

그 이튿날부터 주일 미 제5공군 소속 B-26 폭격기가 출격해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해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29일 맥아더 극동사령관은 한강 전선을 직접 시찰한 뒤 북한군이 한국군을 압도한다고 판단해 지상군 투입을 건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30일 제4차 NSC에서 지상군 파병도 결정했다.

7월1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나흘 후 경기도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최초로 교전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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