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띄우고 단풍 수놓고… 점으로 수렴된 40년 추상 여정

손영옥 2023. 6. 13.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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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관 호암미술관 ‘김환기展’
김환기의 40여년 화업은 전면 점화로 불리는 추상화를 찾아 노마드처럼 세계를 떠돈 여정이다. 사진은 작품 ‘산’(1950년대 초). 리움미술관 제공

김환기(1913∼1974)는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한국 작가다. 대표적인 전면 점화인 일명 ‘우주’((Universe 5-IV-71 #200, 1971)는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32억원에 낙찰됐다. 한국 작가로 경매 가격이 100억원을 남긴 최초의 기록이기도 했다. 직전 최고가 역시 2018년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85억3000만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붉은 전면 점화 ‘3-Ⅱ-72#220’였다. 이처럼 김환기의 점화는 ‘김환기의 경쟁 상대는 김환기’라는 평가를 낳으며 미술시장에서 가장 사랑받는 양식이 됐다. 전면 점화는 김환기가 50세이던 1963년에 한국미술협회이사장, 홍익대 교수 등 자신이 가진 모든 타이틀을 던지고 세계미술의 수도로 새롭게 부상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오로지 예술가로서만 존재하면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도킹해 창안해낸 독창적 추상화다.

김환기가 뉴욕의 작업실에서 전면 점화를 그리고 있다. 리움미술관 제공


전면 점화는 유화 물감을 묽게 만들고, 캔버스는 면천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물감이 마치 수묵화처럼 번지는 효과를 낸다. 그래서 마크 로스코 등 서양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성이 물씬 묻어난다. 그런데 김환기를 대표하는 추상의 세계, 생애 마지막 10년간 뉴욕 시기에 탄생한 전면 점화는 화가 인생 어디서부터 발아하고 있었을까.

삼성문화재단이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의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재개관전을 하며 그 주인공으로 김환기를 택했다. 지금까지 김환기전은 적지 않게 열렸지만, 이번 호암미술관 전시는 ‘한 점 하늘_김환기’전이라는 제목으로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기에 흥미롭다.

‘달과 나무’(1948). 리움미술관 제공


전시장 들머리는 ‘달과 나무’(1948)가 장식한다. 대상을 단순화시켜 크기가 다른 파란색 동그라미 두 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동그라미는 달, 큰 동그라미는 나무다. 이 작품을 이정표처럼 고른 기획자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전시를 통해 점으로 수렴된 40년 추상 여정, 추상 의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김환기는 전남 신안군 기좌도(현 안좌도)의 부잣집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니혼대학(1933∼36년)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일본에서 입체파, 추상파 등 전위미술운동이 일던 시기였다. 김환기 역시 서구의 전위적인 미술을 흡수했다. 1938년 일본 최초의 추상화가 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에 출품해 입선한 ‘론도’ 역시 기하학적인 색면의 반복을 통해 화면에 율동감을 부여한 추상화 작품이다. 그가 추상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다.

김환기는 1956년, 중년에 접어든 43세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로 갔다. ‘동경 유학파’지만 해방을 맞자 예술의 수도 파리로 가고 싶었을 만큼 김환기의 내부에는 변혁의 의지가 꿈틀거렸다. 이곳에서 그는 한국성을 추구하며 달 항아리를 중심으로 산, 달, 매화, 구름, 여인 등 한국적이고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소재를 단순하고 밀도 있게 표현했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가에 기증된 거실 벽화용 대형 작품 ‘여인과 항아리’(1960)는 이 모든 소재가 집약돼 있는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도 나왔다. 특히 프랑스 유학 이후 김환기의 작품에서 집중적으로 보이는 달 항아리는 김환기가 평소 즐겨 수집했던 고미술품이기도 했다. 사방탁자에 놓은 달항아리 등 김환기가 캔버스에 표현한 도자기의 둥근 맛은 ‘달과 나무’의 둥근 맛과 조응한다. 그래서인지 달항아리 역시 점의 이미지로 수렴이 되는 것 같다.

‘항아리’(1956). 리움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의 백미는 프랑스 유학 이전의 30대 시절, 그러니까 한창 자신의 작가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작가 인생 초기의 작품이 우르르 나왔다는 점이다. ‘꽃’ ‘섬 이야기’ ‘산’ ‘뱃놀이’ 등 도판으로만 확인되던 여러 초기작들과 미공개작을 볼 수 있다. 태 실장은 “이번 전시는 한국 근현대미술 연구자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전시가 될 것”이라고 자랑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이 시기 작품에서는 사실적인 풍경화든, 비구상이든 점화의 싹이 보이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시 도입부의 ‘달과 나무’다. 이보다 앞서 그린 ‘꽃’(1930년대 후반)은 꽃의 이미지를 추상화하면서도 꽃을 조각보처럼 화면 분할해 점을 지향하는 작가의 DNA가 읽히는 것 같다. ‘산’(50년대 초)의 경우도 가을 산 풍경을 하늘색과 갈색 톤으로 색면추상처럼 이등분하면서 단풍 든 산을 무수히 작은 점을 찍어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점의 흔적을 찾아 숨바꼭질하는 기분이 드는 전시다.

전시를 통해 김환기가 애장한 달 항아리 등 유품과 편지, 청년시절의 사진, 스크랩북 등 100여건의 자료가 최초 공개됐다는 점도 보는 기쁨을 주는 요소다.

‘17-VI-74 #337’(1974). 리움미술관 제공


그래도 전시의 스펙터클함은 누가 뭐래도 전면점화가 총출동했다는 점에 있다. 유화만 88점이 나왔는데, 그 중 점화가 15점이나 된다. 김환기에 대한 시장의 관심은 2010년대 이전까지는 비구상에 쏠렸다. 그러다 단색화(1970년대 한국에서 태동한 중성색의 추상화)가 인기를 끌면서 추상화의 근원으로서 선배 세대인 김환기의 점화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의 경매 최고 낙찰가 ‘우주’ 보다 더 웅장한 맛을 풍기는 리움 소장 가로 3m 대작 전면 점화가 얼굴을 내밀었다. 파란색, 붉은색, 주황색 등 다양한 색의 변주, 곡선의 변주 등을 하던 김환기 점화의 향연에 풍덩 빠지게 된다. 말년에 마치 죽음을 예감하듯 어둡게 가라앉은 청회색 전면 점화도 여러 점 나와 옷깃을 여미게 한다.

1년여의 리노베이션을 거친 호암미술관 건물 자체도 볼거리다. 외관과 로비는 문화유산 보존 차원에서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내부는 층고를 높여 스케일이 큰 현대미술 전시도 가능하게 했다. 리노베이션 이후 첫 전시 주인공으로 김환기를 택했다는 것은 일종의 선언으로 해석된다. ‘서울 한남동 리움=현대미술, ‘용인 호암미술관=고미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하나의 미술관, 두 개의 장소’로 통합하겠다는 운영 방침을 보여주는 훌륭한 선택이다.

용인=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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