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드링크로 와인을 주는 호스텔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6. 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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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독립의 전야

[김찬호 기자]

계획대로라면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코로나19 이후 아직 육로 국경을 개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제 열차도 아직은 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저는 비행기를 타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향했습니다.

트빌리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시내로 향하던 버스가 갑자기 길을 틀었습니다. 지도 앱에 나온 경로와 다릅니다. 어차피 근처까지는 왔으니, 내려서 숙소까지 걸어 가기로 합니다. 15분 정도를 걸어 숙소 근처에 도착합니다. 근처에 오니, 버스가 방향을 튼 이유를 알았습니다.

제가 조지아에 도착한 날은 5월 25일입니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26일은 조지자의 독립기념일이었죠. 독립기념일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시내 도로에 차량 출입이 통제되어 있더군요. 차 없는 넓은 도로를 걸어 숙소에 들어왔습니다.
 
 트빌리시의 루스타벨리 거리
ⓒ Widerstand
숙소에 도착하니 웰컴 드링크라며 와인 한 잔을 건네 줍니다. 웰컴 드링크를 주는 호스텔은 처음인데, 게다가 와인이라니요. 조지아에 온 것을 실감하게 하는 경험입니다. 
조지아의 특산품은 누가 뭐래도 와인이지요. 와인의 품질도 유명하지만, 그 역사도 깁니다. 이미 8천년 전부터 와인을 생산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생산지죠. 사실 조지아는 아프리카 밖에서 가장 오래된 인간의 거주 흔적이 발견될 정도로 역사가 깊은 땅이기도 합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조지아는 그 깊은 역사만큼 다양한 문화권과 교류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와 적극적으로 교류했죠. 그리스 신화에도 '콜키스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황금 양모를 찾아 떠나는 아르고 호 모험의 목적지가 바로 이 콜키스 왕국이었죠.

페르시아와의 교류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에는 조로아스터교가 크게 확산되기도 했죠. 이후 4세기에는 로마와의 교류를 통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입니다. 이후 조지아는 페르시아나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았죠. 하지만 조지아인은 기독교를 중심으로 독립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갑니다.
 
 성삼위일체 대성당
ⓒ Widerstand
전근대 조지아가 전성기를 이룬 것은 11-12세기 경입니다. 조지아 왕국을 세우고 황금기를 구가했죠. 당시 이슬람 왕조도 비잔틴 제국도 조지아를 장악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다윗 4세와 그 손녀 타마르, 이후 조지 5세까지 상당한 발전을 이뤘죠. 
이 시기 조지아는 군사적인 영토 확장과 함께 예술, 철학, 과학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뤘습니다. 봉건 영주의 힘이 억압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덕분에 이 시기를 '조지아의 르네상스'나 '조지아의 레콘키스타'로 부르기도 하죠. 당시 조지아는 명실상부한 코카서스의 중심 국가였습니다.

조지아의 황금기는 티무르 제국의 침입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됩니다. 같은 기독교 세력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멸망은 조지아에도 위기였습니다. 이란과 오스만이 조지아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습니다.

조지아는 한때 이란의 왕조 교체를 틈타 자치적인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남진하기 시작했죠. 러시아는 1801년 조지아를 병합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자발적인 병합이었지만, 반발은 이어졌습니다. 러시아의 지배에 반대한 일부 귀족이 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고, 농민 반란도 있었습니다.
 
 메테키 성당
ⓒ Widerstand
긴 러시아의 지배에도 조지아의 민족주의 세력은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조지아어라는 언어, 조지아 정교회라는 종교는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었죠. 러시아는 조지아어로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등 통제 정책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역사도 곧 종말을 앞두고 있었죠.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붕괴합니다. 조지아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이 결합하기 시작했죠. 이들은 1918년 5월 26일,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합니다.
1920년 모스크바 조약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도 조지아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조지아의 독립이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 사회에서까지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5월 26일이 조지아의 독립기념일인 이유입니다.
 
 5월 26일을 기념하는 깃발
ⓒ Widerstand
독립기념일의 전야, 제가 있던 트빌리시의 거리는 북적였습니다. 곳곳에 조지아의 국기가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쁘게 거리를 오가고 있습니다. 
105년 전, 조지아 민주공화국이 세워지던 1918년 5월 26일의 전야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트빌리시의 중심가는 들떠 있었을 것이고, 같은 마음으로 국기를 거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과 국기의 모습은 다르겠지만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독립된 조지아의 역사는 길지 못했습니다. 북적이는 독립의 전야에는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조약 이후 9개월 만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입합니다. 조지아는 곧 소련에 합병되죠.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총리였던 노에 조르다니아(Noe Zhordania)는 프랑스로 탈출해 망명정부를 꾸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조지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1953년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트빌리시 건설 1500주년에 맞춰 1958년 건설된 어머니 조지아상.
ⓒ Widerstand
105년 전 독립의 전야에 트빌리시의 시민들은 그런 결말조차 짐작하고 있었을까요. 위태로운 정세 속에서 그들이 내건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국기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들은 105년 뒤 오늘의 독립기념일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1918년 트빌리시의 시민들에게 2023년 오늘은 너무도 먼 이야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독립도 자유도 한때의 꿈으로만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시대였으니까요.

그러나 오늘도 트빌리시의 거리에는 조지아의 국기가 내걸리고 있습니다. 1921년 조지아를 침공하던 소비에트 적군에게도, 긴 시간을 지난 오늘의 독립기념일을 상상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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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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