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이 평생 매달린 생트 빅투아르산에 가봤습니다

백종인 2023. 6. 1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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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세잔의 도시, 엑상프로방스

[백종인 기자]

▲ 로똥드 분수 엑상프로방스의 랜드마크라 하는 로똥드 분수에서부터 미라보 거리가 시작된다.
ⓒ CHUNG JONGIN
 엑상프로방스(Aix-en Provence)는 Aix가 라틴어로 물을 의미하는 그대로 물의 도시이다. 또한, 세잔의 도시이다. 여기에 빈센트 반 고흐가 살짝 고개를 내민다. 프랑스에서 엑상프로방스라고 말하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짧고 쉽게 그냥 엑스.

5월의 엑스 날씨는 내가 살고 있는 엘에이 날씨와 흡사했다. 엑스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엑스의 랜드마크라 하는 로똥드 분수를 비롯한 수많은 분수도, 중세 시대에 지어진 성당도 아니었다.

미라보 거리와 구시가 골목 곳곳에 자리 잡은 야외 카페와 음식점에서 낮부터 밤까지 먹고 마시며 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일도 안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코로나 시대에 이곳 사람들이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인 문제보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고립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 엑상프로방스의 밤 거리 엑스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미라보 거리와 구시가 골목 곳곳에 자리 잡은 야외 카페와 음식점에서 낮부터 밤까지 먹고 마시며 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 CHUNG JONGIN
 엑상프로방스는 15세기 말 프랑스 영토로 편입된 이후 혁명 이전까지 프로방스의 수도였다. 인구는 15만에 불과하지만, 도시가 부유하고 세속적이며 늘 관광객으로 붐빈다. 엑스에서 가장 활기찬 곳은 미라보 광장으로 폭 42m의 넓은 거리는 키가 큰 플라타너스로 그늘지고 카페와 식당, 상점이 줄지어 있다.
미라보 광장 안쪽 구시가지는 복잡한 골목과 상점들, 시청과 법원 및 성당, 그리고 곳곳에 있는 분수대 등 16, 17, 18세기의 오래된 건물들이 얽혀 있다. 일주일에 세 번, 화, 목, 토요일에는 시청 앞을 중심으로 장이 서는데 이곳에 나온 과일, 야채, 꽃 등의 지역 농산물들은 싱싱하고 값도 쌌다. 
 
▲ 엑상프로방스의 장터 장터에 나온 과일, 야채, 꽃 등의 지역 농산물들은 싱싱하고 값도 쌌다.
ⓒ CHUNG JONGIN
 지인 집에 머물어서인지 귀한 여행임에도 책자에 나오는 명소들을 무시한 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엑스만의 활기찬 분위기를 즐기며 다녔다. 물론 세잔이 남긴 삶의  발자취를 찾고 그룹 여행을 이용하여 고흐의 흔적과 뤼브롱 산기슭의 오래된 마을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평화롭고 경쾌한 엑스의 어두운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기회도 가졌다.
세잔 삶의 발자취
 
▲ 화가의 고개(Terrain des Peintres) 화가의 고개에서 보이는 생트 빅투아르산. 세잔은 멀리 우뚝 솟은 생트 빅투아르산을 그리기 위해 매일 고개를 올랐다.
ⓒ CHUNG JONGIN
 엑스에 도착하여 처음 찾은 곳은 세잔이 멀리 우뚝 솟은 생트 빅투아르산을 그리기 위해 매일 올랐던 화가의 고개(Terrain des Peintres)였다. 세잔이 말년에 마련한 아틀리에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언덕에서 생트 빅투아르산을 그리기 위해 그 장소를 선택한 거 같다. 

엑스에서 태어나 엑스에서 죽은 세잔은 어린 시절 친구였던 에밀 졸라와 함께 보냈던 생트 빅투아르산을 주제로 유화 36점, 수채화 45점을 그렸고,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생트 빅투아르산을 그리기 위해 화가의 고개를 올랐다. 

길을 따라 언덕 위 전망대로 올라서자, 주변 마을이 보이고 멀리 있는 뾰족한 산꼭대기 위로 어렴풋이 십자가가 보였다. 전망대에는 세잔이 그렸던 생트 빅투아르산 그림의 복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림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생트 빅투아르산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생트 빅투아르산의 무엇이 세잔을 평생 매달리게 했을까? 직접 산을 찾고 싶어졌다.
 
▲ 생트 빅투아르산 정상 생트 빅투아르산 정상에 앉으니, 옆으로 길게 뻗은 절벽 아래로 넓은 평원과 마을들 그리고 비몽댐이 보였다.
ⓒ CHUNG JONGIN
   
▲ 생트 빅투아르산 정상의 십자가 정상에는 화가의 고개에서 어렴쿳이 보였던 프로방스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 CHUNG JONGIN
 엑스에서 생트 빅투아르산까지 가려면 한 시간마다 다니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비몽 댐을 건너 파란색으로 표시된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생트 빅투아르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숲을 지나니 바위와 절벽이 계속되었고 해발 1,011m의 정상까지 쉼 없이 가도 2시간 반 이상 걸렸다.

등산로 곳곳에서 보이는 비몽댐이 점점 작아졌다. 정상을 앞두고 수도원이 나타났고 정상에는 프로방스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화가의 고개에서 보았던 십자가였다. 정상에 앉으니, 옆으로 길게 뻗은 절벽 아래로 넓은 평원과 마을들 그리고 비몽댐이 보였다.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의 다소 거칠고도 두려우면서도 친구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막상 엑스에는 세잔의 그림이 많지 않다. 매진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아틀리에에는 세잔의 그림이 없고 구시가에 있는 그라네 박물관에도 몇 점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트 빅투아르산을 직접 간 것으로 세잔의 흔적 찾기는 충분했다. 

실망을 안겨 준 빈센트 반 고흐의 흔적 찾기
 
▲ 아를 정신병원의 정원 위의 사진은 아를 정신병원 정원의 현재 모습이고 아래는 고흐가 그림 정원 모습이다.
ⓒ CHUNG JONGIN
 1888년 2월, 복잡하고 추운 파리 생활에 지친 고흐는 따뜻하고 빛이 밝은 프로방스의 아를로 이주했다. 아를에서 1년 반, 생레미 요양원에서 1년 등 2년 반에 걸쳐 고흐는 엑스에서 가까운 프로방스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약 350점 이상의 그림을 프로방스에서 그렸음에도 정작 프로방스에는 고흐의 작품이 없다. 그를 매혹시켰던 빛과 자연 경치가 여전할 뿐이다.
 
▲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올리브 과수원 고흐가 입원했던 생레미 요양원 시절 자연 속으로 나와 알필 산맥을 바라보며 그렸던 올리브 나무가 울창한 평원
ⓒ CHUNG JONGIN
   
▲ 카페테라스 고흐의 그림 <카페테라스>가 있넌 곳
ⓒ CHUNG JONGIN
 고흐의 흔적을 찾는 일일 관광에 나섰다. 고흐의 자취를 중심으로 한 생레미와 아를 관광으로 생각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고흐보다는 로마 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본 관광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찾은 고흐의 흔적은 고흐가 입원했던 생레미 요양원 시절 자연 속으로 나와 알필 산맥을 바라보며 그렸던 올리브 나무가 울창한 평원과 아를의 콜로세움과  <카페테라스> 자리, 그리고 고흐가 입원했던 아를 정신병원의 정원 정도였다.

생레미 정신병원도 고흐가 살았던 노란 방도 고흐가 그렸던 장소와 비교하는 고흐의 디지털 작품도 볼 수 없었다. 목적을 잃어버린 뭔가 빠진 듯한 관광이었다. 그런대로 자연과 자연의 빛을 사랑했던 고흐의 정신 세계는 느꼈다고 할까?

엑상프로방스의 이웃, 뤼브롱(Luberon) 산맥 기슭의 마을들
 
▲ 뤼브롱(Luberon) 산맥 기슭의 마을들 시계방향으로 고르드, 퐁텐드보클뤼지, 루르마랭, 뤼시용이다.
ⓒ CHUNG JONGIN
 엑스에서 60km 정도 북쪽으로 가면 뤼브롱산 기슭의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을들이 모여 있다. 프로방스의 전형적인 시골이다. 뤼브롱의 높고 낮은 산자락에 있는 마을들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특유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데, 차량 이동이 쉽지 않아 대개는 여행사를 이용한다. 우리도 그룹 여행에 합류하여 뤼브롱의 네 개 마을을 방문했다. 

처음 도착한 마을은 장이 서고 있는 루르마랭(Lourmarin)이었는데, 장터로 가려진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조용한 전원 그 자체였다. 두 번째 마을은 황토 마을로 알려진 뤼시용(Roussillon). 언덕과 산은 물론 건물 대부분이 돌과 황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간 곳이 가장 유명한 고르드(Gordes)였는데, 고르드는 마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이었다. 돌로 쌓아 올린 절벽 위에 마을이 있었고 그 꼭대기에 고르드 성이 있는 것이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본 그림을 연상시켰다.

세 개 마을 방문으로 슬슬 피로가 느껴질 무렵 절벽과 에메랄드빛 녹색 강으로 유명한 퐁텐드보클뤼지(Fontaine-de-Vaucluse)로 갔다. 우리는 콜론 광장을 지나 시작되는 산책길 카페에 앉아 넋을 잃고 녹색 강물을 바라보았다. 겉만 훑은 것 같은 아쉬움이 많은 방문이었다. 여유가 있다면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각 마을의 정취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트랜스아틀란틱 속의 캠프데밀즈(Camp des Milles)
 
▲ 캠프데밀즈 넷플릭스 드라마 트랜스아틀란틱에 나온 수용소가 엑스 외곽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 CHUNG JONGIN
 넷플릭스 드라마 <트랜스아틀란틱>은 2차 대전 초기 프랑스가 독일군에 점령되었을 때 미국인이 중심이 되어 마르세유 인근 수용소에 억류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탈출을 돕는 이야기다. 여기의 수용소가 엑스 외곽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엑스를 떠나기 직전, 우리는 벽돌 공장에서 포로수용소가 되었던 캠프데밀즈를 찾았다.

수용소는 1940년 6월까지 나치에 반대하는 3,500여 명의 세계적인 문필가, 과학자, 예술가 등을 구금했고, 이후 1942년까지 아우슈비츠로 가는 임시 정거장이 되었다. 이들은 공장 바닥에서 잠을 자고 3,000여 명의 인원이 단 4개의 화장실을 사용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이들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연극과 음악 공연을 하는 등 지루함과 힘겨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때 제작한 많은 예술품은 사라졌으나 일부의 흔적은 수용소에 남아있고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 캠프데밀즈 수용소에 남겨진 벽화 캠프데밀즈에 억류된 예숙가들은 절망속에서 공포를 잊고자 벽에 그림을 그렸다.
ⓒ CHUNG JONGIN
 밝은 햇살이 비치는 대낮에도 캠프 안은 어두컴컴하고 음습했다. 내가 만드는 발소리가 울리는 텅 빈 캠프 안을 걷다가 그들이 남긴 예술품을 보고 있자니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공포를 이겨내려는 그들의 간절한 몸부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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