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피폭의 교훈

조효석 2023. 6. 12.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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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석 뉴미디어팀 기자

내달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인류와 환경에 미칠
잠재적 위험 외면해선 안돼

“지구 역사상 전례 없는 파괴의 비(rain of ruin)가 하늘에서 내릴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끝머리인 1945년 8월 6일, 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낸다.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역사상 첫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였다. 당장 항복하지 않는다면 원폭 투하를 추가 실시한다는 경고였지만 일본 군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 폭탄이 재차 떨어지고 나서야 일왕은 이른바 ‘옥음방송’으로 항복 선언을 한다.

일제가 첫 원폭 투하 뒤 곧바로 항복하지 않은 건 전쟁의 광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원폭의 진짜 무서움을 인류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해서이기도 했다. 피폭의 당사자인 일본인들, 심지어 투하를 결정한 미국 정부조차도 원폭이 최종적으로 어떤 피해를 미치는지 그때껏 알지 못했다. 피폭된 사람들은 폭탄이 터졌을 때보다도 한 달, 두 달이 지난 시점에 더 많이 죽어나갔다. 도시와 사람들을 뒤덮은 방사능 때문이었다.

종전 뒤 일본에 들어선 미 군정은 위원회를 구성해 피폭자를 조사하지만 결과를 곧장 세상에 알리진 않았다. 참상이 제대로 알려진 건 1970년대에 이르러 피폭자들의 잔혹한 영상과 사진이 공개되고 나서였다. 미국 사회에 원폭 투하 결정에 대한 회의론이 본격 대두된 것도, 일본에서 피폭 생존 당사자인 작가가 당시를 고발한 반전만화 ‘맨발의 겐’을 출간한 것도 이때쯤이다. 현재의 방사능 피폭 연구 상당 부분은 당시 피폭자 조사에 빚을 지고 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일본 군부는 처음 듣는 이 신기술에 의한 폭격이 그때까지의 여느 폭격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고서 버티기를 선택했다.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일본 군부가 원폭 방사능 피폭이 어떤 영향을 남길지 제대로 알았다면 과연 첫 원폭 투하 뒤에도 항복하지 않고 버텼을지는 의문이다. 그들이 다른 판단을 했더라면 어쩌면 조선인 수만명을 포함한 피폭자 수십만명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원폭의 기억이 한 세기도 온전히 지나지 않은 지금 방사능 피폭을 둘러싼 공포는 현해탄을 건너왔다. 역설적이게도 이번엔 일본이 피폭 책임으로 비난받는 입장이다. 이르면 다음 달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할 전망이다.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대일 관계 회복을 선언한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은 찬성도 반대도 아니라지만 여권의 태도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적극 반복하는 쪽에 가깝다.

원폭의 역사가 준 교훈 중 하나는 과학적으로 확언할 수 없는, 잠재적 위험이 있는 분야엔 그에 기반한 정책적 판단에 신중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여태 피해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일본의 방류를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압도적인 국내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우려조차 일절 표명 않는 게 일국의 정부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인지 의문스럽다.

원폭의 교훈을 가장 되새겨야 하는 건 사실 일본 정부다. 일본은 2차대전 종전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쟁 가해자가 아닌, 피폭 피해자로서의 입장을 강조해 왔다. 근래 서방 정상과의 회담마다 원폭 피해자를 기리는 행사를 마련한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런 국가가 정작 방사능 피폭을 향한 주변국 시민들의 우려는 외면한 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검증이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방류를 밀어붙이는 모습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번만큼 대규모 방사능 오염수 방류가 환경에, 그리고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미지의 영역에 가깝다. 여론조사상 반대가 70~80%를 넘나들 정도로 국내 여론이 들끓는 것은 사실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된 채 그런 잠재적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양국 정부가, 아니 세계가 역사로부터 얻은 교훈을 함부로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조효석 뉴미디어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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