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민의 사이언스&테크놀로지] 화학은 의학의 근원… ‘화합물’ 확보로 미래 건강 기틀 다져야

2023. 6. 12.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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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제품’이라는 단어는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학’이란 단어는 물질의 정체와 변환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를 뜻할 뿐이다. 화학 없이는 생명과학의 발전이 불가능하고, 생명과학이 없이는 의학이 존립할 수 없다. 특히 신약개발 분야에서 그 위력은 지대하다.

흔히 신약을 개발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 번째는 자연에서 필요한 성분을 얻어내는 ‘천연물신약’, 두 번째는 화학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어내는 ‘케미컬신약(합성화합물 신약)’, 세 번째는 생명현상을 이용하는 ‘바이오신약’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방법론이다. 완성된 의약품은 어떤 것이든 결국 ‘화합물’일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화학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천연물신약도, 최근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신약도 개발이 어렵다는 뜻도 된다.

약이란 원래 화합물

현대의 신약개발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것일까. 핵심은 약물의 주요 성분이 될 물질, 이른바 ‘후보물질’을 찾아내는 데 있다. 병원체의 형태, 우리 몸에 들어와 감염을 일으키는 과정과 증상 등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 그다음엔 어떻게 병원체와 싸울지를 정해야 한다. 병원체를 몸속에서 사멸시키거나 증식을 막거나 우리 몸속에 있는 면역 반응에 도움을 주는 등 다양한 방법을 고려하고, 병원체 특성에 맞게 그 약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공략할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다음엔 이런 효과를 낼 수 있는 물질을 자연 속에서 찾아내거나 케미컬 혹은 바이오 기술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다음 철저한 안전성 검사와 임상시험을 진행해 세상에 내놓으면 이것이 이른바 신약이 된다.
천연물신약의 경우 필수성분을 자연에서 찾아냈으니 그 성분을 추출하는 것만으로도 제품화가 간단히 이뤄질 것 같지만 의외로 화학적인 합성기술은 필요하다. 화학과 생명과학 지식이 없던 과거엔 천연물을 그대로 끓이거나 찌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전통의학 분야를 제외하면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천연물 속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하고, 그 성분과 분량을 확인하고, 이를 다시 화학기술을 통해 합성해 결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현대의 천연물신약이란 주요 성분을 천연물에서 얻어냈을 뿐 사실상 개발 방식이나 공정은 케미컬신약인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독감 치료제로 유명한 타미플루도 중국 향신료 팔각 열매에서 추출한 시킴산이라는 원료를 이용하는데, 원재료를 자연에서 얻긴 했지만 그 유효성분을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 단계의 화학적 공정을 거친다.
타미플루와 화학식

화학합성기술로 약을 만드는 방법

그렇다면 케미컬신약은 어떻게 개발하는 걸까. 필요한 성분을 화학적 합성기법을 이용해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하나 만드는 것일까. 이렇게 하려면 우선 화학자들이 필요한 합성화합물의 설계도부터 그린 다음, 정말로 만들 수 있는지를 수없이 많은 실험을 하며 반복해야 할 것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효율이 대단히 떨어져 실제로 이렇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은 기존에 만들어뒀던 많은 합성화합물을 살펴보고, 그중 필요한 성분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일부분 조합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원하는 물질을 빠르게 얻어낼 수 있고,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도 크게 줄일 수 있다. 기존 연구에서 활용도를 찾지 못했던 화합물이 새로운 화합물과 합성하거나 비교하면서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신약으로 거듭나는 일도 자주 볼 수 있다. 즉 천연물신약이 자연에서 후보물질을 찾은 것처럼 케미컬신약도 이미 존재하는 화합물 속에서 후보물질을 찾아야 한다.

초창기 항생 물질 설파제 사례를 살펴보자. 이 약은 1930년대 독일 과학자 게르하르트 도마크가 개발한 ‘프론토질’이란 약에서 기원한다. 본래 염색약으로 쓰던 것으로, 색을 내기 위해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사용하던 화학성분이었다. 도마크는 세균을 죽일 수 있는 약을 연구하던 중 프론토질 효과를 동물실험을 거쳐 확인한 후 사람에게 사용해 성공했다. 나중에야 프론토질 속 설파닐아마이드 성분이 약효를 결정하는 주성분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발명은 이후 1950년대까지 5000여종의 설파계 약물이 개발되는 시초가 됐고, 도마크는 이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약물을 개발하기 위해 화학식을 그려 놓고 처음부터 연구한 것이 아니라 효과가 있던 성분을 발견한 뒤 그것을 연구하며 조금씩 변형해 효과를 점차 높여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케미컬신약 개발자들은 무엇보다 화합물 샘플을 중요하게 여긴다. 합성화합물을 종류별로 모으고, 화학식을 정리해 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며, 그 샘플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저온 환경에 보관한다. 이렇게 보관하고 있는 지적 자산은 제약회사들엔 보물창고와 같다. 신약을 개발할 때 처음부터 하나하나 실험할 것이 아니라 화합물 라이브러리에 존재하는 구조대로 즉시 비교해 보고 성공 확률이 높은 물질부터 실험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美·中, 매년 1조 투자… 韓은 40억 투자

합성화합물의 확보와 관리는 국가적 사안이다. 세계 어느 나라나 이 분야 자원 확보에 큰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국립보건원(NIH) 산하에 NCATS라는 정부투자기관을 2012년부터 운영하고 있는데, 한 해 예산은 1조원에 육박한다. 중국도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국립화합물은행(CNCL)이란 기관이 관련 사업을 맡고 있는데, 이곳 연 예산도 1조원에 달한다. 참여 인력만 1000명을 넘어서며, 확보한 합성화합물 자원의 숫자는 220만종에 달한다. 우리의 투자는 상대적으로 부족해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대표기관인 한국화학연구원 산하 한국화합물은행의 연평균 예산은 40억원 정도다. 적은 예산에 비해 70만종의 적지 않은 화합물을 확보했지만 앞으로 투자가 더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전 세계를 강타했던 코로나19 팬데믹도 이제 출구를 지나고 있다. 그러나 바이오 재난이 언제 또다시 우리를 찾아올지 모른다. 그때 더 안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 나아가 인류의 건강과 존속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는 독자적이고 신뢰할 만한 기술과 연구자원 확보에 더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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