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한이주민과 결혼했다! 남편이 북한이주민이라면?
지금 한국의 젊은 층에게 ‘북한 사람’은 어떤 이미지일까? 영화나 드라마 속 군복을 입은 북한군, 국제 스포츠경기 때 만나는 대표단 선수 혹은 응원단, 〈모란봉 클럽〉 같은 예능에 출연해 탈북 경험을 털어 놓는 출연자의 이미지가 아마도 대다수 아닐까. 1983년, 수만 명의 이산 가족의 일시적 만남이 무려 138일 동안 특별 생방송으로 이어지며 온나라를 눈물과 감동에 빠뜨렸다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장면도 이제는 교과서나 교양 프로그램에서 볼 법한 자료처럼 느껴질 뿐.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던 2018년 8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이들의 연령은 대부분 80대나 90대였다. 서류 상으로 나뉘어진 국적을 제외하면 서로를 껴안고, 가늠되지 않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이들 중 누구는 북한 사람이고 누구는 남한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까.
‘탈북민’ 혹은 ‘새터민’으로 호명돼온 북한이주민들은 내게 미지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탈북을 한다는 데 왜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지? 대학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같은 기대는 당연히 이뤄지지 않았다. 서강대에서 중국문화를 전공하고 장르 소설가이자 번역가로 활동하는 김이삭 작가는 서울 토박이다. 지금의 남편을 알게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고향을 묻는 질문에 머뭇대다가 “북쪽인데요”라고 말한 남편의 답을 듣고 내심 ‘서울은 북쪽이 아닌가? 경기 북부에서 태어났다는 뜻인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북한 이주민인 남편과 가정을 꾸리고 지금은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이삭 작가는, 어쩌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 경계인의 삶에 서게 된 자신의 경험을 에세이 〈북한 이주민과 함께 삽니다〉를 통해 풀어낸다. 망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이삭 작가는 ‘한 번도 북한 이주민을 만나본 적이 없다’라는 내 말에 “아마 만나도 못 알아봤을 거예요. 북한이주민과 사귀고 결혼을 한 저도, 알고 보니 제 지인도 같은 북한이주민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는 걸요.”라며 웃음 지었다. 생김새와 언어가 그만큼 꼭 같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먼저 이주민인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들의 상황에 대해서도 짐작하게 됐다. 현재 이들을 호명하는 공식 명칭은 ‘북한이탈주민’이지만 김이삭 작가는 ‘북한이주민’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북한을 '이탈'한 존재가 아닌, 지금 한국을 살아가는 이주민의 관점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 살아가는 다른 이주민들과 연대하고 우리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비춰졌으면 한다는 작가의 바람대로, 〈엘르〉도 ‘북한이주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Q : 책이 나온 이후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A : 인터뷰나 라디오 방송 제안도 받고, 소설 쓸 때와는 또 다른 반응을 느끼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도 그동안 궁금했는데, 제가 말을 먼저 안 하니까 묻기가 어려웠대요. 내적 친밀감이 상승했다며 시부모님을 소개해 달라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Q : 책을 보니 시어머니가 정말 ‘인싸’시더라고요(웃음)
A : 정말 주변과 잘 지내세요. 혈혈단신 남한에 오게 된 사람이 많기 때문에 결혼식 혼주 요청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고 몇 번이고 서곤 하시죠. 함경북도 출신인 시어머니의 부모님이 만주에 사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충청도 출신인 제 할머니가 10대 때 만주에서 지냈던 동네와 같은 곳이더군요.
Q : 놀라운 인연이네요! 책을 소개할 때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종종 언급되더군요. 북한에 대해 친근하게 다룬 콘텐츠가 별로 없기 떄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A : 북한 이주민의 삶은 미디어에 비춰지는 것 외에도 다양해요. 그런데 나오지 않는 이야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노출되지 않는 거죠. 북한 이주민 당사자가 한국 사회에 대해 말하면 공격받기 쉽잖아요. 내가 일종의 완충재가 돼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그게 에세이에 도전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저는 이 책이 ‘마중물(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 위에서 붓는 물, 작지만 큰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꼭 북한 이주민이 아니라 한국에 사는 이주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Q : 북한 이주민인 남편을 대학교에서 만났습니다. 홍콩영화와 중국 드라마, 대만 가수 ‘덕질’을 할 정도로 다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게 편견을 줄이는 데 일조했을까요
A : 물론 영향이 있어요. 중문과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나 차별받는 당사자가 아니었기에 엄연히 존재하는 다름과 그로 인한 차별을 간과하기도 했죠. 정체성을 고민하는 화교 친구에게 “우리랑 네가 다를 게 뭐 있냐”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는데, 취업할 때 보니 이들은 외국인을 안 뽑는 회사는 지원조차 할 수 없더군요.
Q : 북한 이주민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의 편견 어린 시선도 경험하지 않았을까요
A : 물론입니다. 책을 내면서 출판사와도 이견이 있었어요. 한국과의 차이나 북한 이주민의 실상 같은 게 조금 더 자세하게 들어가길 바랐거든요. 그런데 제가 북한학 연구자는 아니거든요. 살다 보니 북한 이주민과 가족이 됐다고 해서 이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죠. 이들이 겪은 현실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요. ‘남한 사회가 불쌍한 너희를 품어줬다’는 식의 시혜적 시선이 가득한 북한 이주민들의 인터뷰집을 읽은 적 있어요. 이들이 겪은 현실과는 별개로 저는 고통 서사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가 들려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들은 나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니까요. 다름에만 집중하다 보면 편견만 커질 뿐입니다.
Q : ‘흔하지는 않은, 배우자의 가족’ 챕터에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언니들과 시동생, 시사촌 언니들이 소개됩니다. 첫째 시언니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올 때의 인연으로 가족이 된 경우더군요
A : 모두 한 번에 넘어오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대가족이 남한에 정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시댁은 운이 좋았던 편이에요. 지금은 다들 정착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함께 할 수 있는 다른 이야기가 많은데도 여전히 명절 때 한자리에 모이면 북한 이야기를 나눠요. 저는 그게 해원굿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Q : 단편 〈애귀〉에 북한 이주민 여성을 등장시켰을 당시에도 고민이 많았고, 후회했다는데 이유는
A : 연재 사이트에 단편을 올렸는데 바로 계약이 됐어요. ‘현실이 잘 느껴지게 썼다’는 독자 반응도 있었죠. 제가 소설가로서 열심히 취재해서 쓴 게 아니라 자연스레 알게 된 걸 썼을 뿐인데 내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주니 부끄럽더군요. 내가 소수자성을 팔아 치운 걸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북한 이주민 이야기는 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 아무도 안 쓰더라고요(웃음)!
Q : 더 내고 싶은 목소리는
A : 북한 이주민 이야기를 할 때 북한과 중국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러다 보면 ‘남 탓’이 되고, 정작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넘어가게 되죠. 그런데 한국 사회로 온 이후에도 부당함을 많이 겪거든요. 인권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자기 이익을 챙기기 바쁜 단체도 많고요. 그러나 북한 이주민 사회가 워낙 좁고, 사회적 쿠션이 없는 이들에게 공론화는 불가능합니다. 언젠가 이런 문제를 쓰고 싶어요. 나와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요.
Q : 소수자를 지원하는 여러 정책에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기입니다. “한국에 사는 북한 이주민이 평범한 남한 사람보다 잘사는 것 같다”는 누군가의 말과 '평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던 혐오가 집값과 교육 문제에 얽히면 확실히 체감된다'는 이야기를 책에도 썼는데
A : 이주민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시혜적인 시선으로 해석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혜는 사실 혐오와 한 끗 차이에요. 나보다 낮은 존재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으니까요. 서울 양천구의 한 임대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보증금은 물론 월세와 관리비도 임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남한 사람과 똑같이 내는데도 무료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저는 소수자를 위한 지원 제도를 일종의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라고 생각해요. 한국 사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추락하지 않도록 촘촘한 망을 설치하는 거죠. 그 망은 이주민을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부모와 나 모두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라고 해서 승승장구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도 언제든 떨어질 수 있어요. 그럴 때 그 망이 우리도 붙잡아주겠죠. 아이를 교육시켜 시민으로 키워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제도적 지원을 통해 이주민의 정착을 도와서 한국 사회의 시민으로 양성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일종의 사회적 투자죠. 이주민도 한국에서 함께 일도 하고 세금도 내잖아요.
Q : 한국인인 북한 이주민 2세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덜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배우자분도 북한에 살았던 건 열 살 때까지인데
A : 북한이주민이 남한에 가장 많이 넘어온 시기가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때인데요. 그 이후에 태어난 2세대가 성인이 됐을 때 내 부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스티븐 킹의 〈나중에〉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주인공에게 엄청난 출생의 비밀이 있어요. 그런데 이 주인공이 직면한 더 급한 문제는 기괴한 악마적 존재가 자신을 쫓는다는 거죠. 태생은 네가 바꿀 수 없는 것이니 일단 지금 문제를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좋더라고요. 모든 것을 파헤칠 필요는 없더라도 1세대가 겪은 일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를 찾아 한국에 온 아들(장동윤)이 어머니(이나영)가 탈북자이자 인신매매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영화 〈뷰티풀 데이즈〉 처럼 어떤 기록은 무겁더라도 필요해요.
Q : 북한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너무 적다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향한 전세계적 환호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에요
A : 우리에게 북한은 미지의 세상이다 보니 무지에서 오는 공포가 분명히 있죠. 그래서인지 북한이주민을 조명할 때도 지금 이 사람들이 여기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보다 그들이 경험한 과거의 북한 이야기를 알고자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영화 <미나리> 를 통해 미국 사회를 살아가는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하는 것과, 8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에게 지금 한국은 어떤 나라냐고 묻는 건 전혀 다른 일이거든요. 북한 이주민에게 ‘김정은 요즘 안 보이는데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으면 그들도 알리가 없죠. 아마 가족들 중에 정치에 그나마 관심있는 사람은 저 뿐일걸요(웃음).
</미나리>
Q : 지금의 북한과 북한 이주민의 삶은 별개인 것처럼요
A : 소수자의 목소리는 항상 단순화돼요. 당사자라는 이유로 모든 걸 아는 건 아닌데 그렇게 짐작하는 경우가 너무 많죠. 그리고 북한이주민을 통해 북한을 보려고 하는 것은 이들이 겪었던 문제의 책임을 북한으로 넘기고, 지금 겪고 있는 문제를 소거할 뿐입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 100만 명 중 북한이주민은 통계상 3만 명 정도로 집계돼요. 소수죠. 저는 북한이주민에게 그들이 떠나온 과거의 북한에 대해 묻기보다 지금의 삶을 물어보기를, 이주민의 관점에서 접근하길 바라요. 한민족이라는 배타성에 갇히지 않고, 다른 이주민과의 연대가 가능하도록요.
이미 내가 어딘가에서 만났을 수도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럼에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책에 개성순대나 두부밥 이야기가 살짝 나오던데요. 그래도 시가족들과 함께할 때 확실히 다르다고 느끼는 문화가 있나요?” 김이삭은 말했다. “도토리라면 질색하는 남편을 볼 때 다름을 느끼긴 해요. 북한에 있을 때 끼니마다 도토리묵을 주식으로 먹어서 질렸다면서요. 그런데 정말 다들 김치를 많이 먹어요! 생각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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