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조장 그림 그리러 제주도에서 비행기 타고 와요 [소설가 신이현의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

신이현 2023. 6. 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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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다정한 만화가 연돌의 경우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소설가 신이현이 충북 충주에서 사과 농사를 짓고 양조장을 만들었습니다. 와인만큼이나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그가 달콤하게 와인 익어가는 냄새가 나는 양조장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편집자말>

[신이현(작가)]

 포도밭의 남자 레돔을 졸졸 따라다니며 스케치를 하는 연돌.
ⓒ 신이현
 
"아니, 떨어졌다고? 진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뭐가 잘못된 것일 거야. 항의해야 돼!" 만화영상진흥원에서 하는 창작지원사업에 낸 계획서가 인터뷰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리는 망연자실하면서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펄펄 뛴다. 공모사업 지원금으로 1년 동안 내가 하는 양조장과 농사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겠다는 계획이 다 틀어져버린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돼죠? 우리 주인공 레돔(나의 남편 도미니크의 애칭)씨는 어디로 가는 거죠?" 만화가 김연수, 우리는 그냥 연돌이라 부른다. "지원금 없이 1년을 일하는 건 어려워. 너 왔다갔다 하는 경비라도 있어야지."
110페이지 정도의 만화를 그리는 데 적어도 1년이 걸린다. 책으로 나오면 가격은 권 당 1만5000원 정도인데 그 중의 10퍼센트가 작가에게 돌아간다. 1쇄 2000부 찍는다면 (요즘은 1000부도 어렵다) 300만원이 작가에게 간다. 만화책 한 권 내면 대체로 연봉 300으로 끝난다. 그나마 풀칠이라도 하며 작업을 하려고 지원금에 목을 매달았다. 그런데 똑 떨어져버렸네. "일단 내년을 기다려보자."
 
 저 작은 스케치 수첩 안에 레돔 양조장이라는 우주가 모두 들어가 있다.
ⓒ 신이현
 
그렇게 1년이 지나 다시 올 봄이 왔다. 모든 만화가를 설레게 하고 절망에 빠트리는 계절이 돌아왔다. "이번엔 꼭 성공해야 돼요! 지난 번 것 싹 지우고 다시 시작해봐요!" 연돌의 얼굴에 의지가 불타오른다. 슬며시 웃음이 난다. 연돌은 대체로 고운 옷을 입고 나긋나긋하게 움직이고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내성적이고 연약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저돌적이다.

"그래. 이번에 안되면 그냥 죽자. 그런데 지난번 제목을 좀 바꿔야 할 것같아." 내가 한마디 하면 연돌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백마디를 한다. "레돔의 한국 농부 생활?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에요. 알자스 맛의 2편이니까 충주의 맛? 아아 이것도 아니야. 어디 팍 꽂히는 제목 없나요?"

우리는 제목 하나 뽑는 데 영혼을 갈아넣고, 주인공의 눈짓 하나 그리는 데도 영혼을 갈아넣고, 대사 하나하나에도 영혼을 갈아넣고, 무엇을 하든 다 갈아넣기에 영혼이 백개라도 모자란다.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 안 뽑아주고 대체 누구를 뽑는다는 거야? 이번에 안되면 진짜 거기 사람들 다 미친 거야! 와, 이번 그림 좀 봐. 진짜 너무 좋아!" "언니 우리 너무 자뻑인 거 아니에요?" "좀 그런 면이 있긴 해." 
   
▲ 일하는 거 맞아요, 맞다니깐요 포도잎을 다듬는 필자와 연돌.
ⓒ 신이현
 
연돌을 처음 만난 것은 파리에서였다. 그때 그녀는 만화학교에 공부하러 온 학생이었고 나는 프랑스 남자와 결혼한 주부였다. "알자스의 맛, 이 책을 만화로 그려보고 싶어요." 어느날 내가 쓴 알자스 이야기를 읽고 연돌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우리 공동 작업의 시작이었고 프랑스에서 한국 충주에까지 이어졌다. "레돔씨의 제 2의 인생, 충주의 맛을 그릴 수 있음 너무 좋겠는데." 연돌이 이렇게 말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녀는 제주에 살았고 어린 아들이 있어 집을 비우기가 쉽지 않았다. "언니, 공모사업 떴는데 레돔씨 농사 이야기 한번 해볼까요?" 공모사업이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덤벼볼까?"
첫번째 고배를 마시고 두번째 도전에서 선정되었다. 얏호! 만세를 부르기 바쁘게 마감 날에 대한 두려움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양조장과 포도밭 사계절 이야기를 8개월 만에 끝내야 했다. 마감을 맞추지 못하면 지원금을 모두 토해내야 한다. "내가 제주에 가면 나야 너무 좋지만 만화를 위해서는 네가 충주에 와야 된다. 알지?" 이렇게 해서 '충주의 맛' 작업이 시작되었다.
   
 연돌이 그려준 내 책 <인생이 내추럴해지는 방법> 표지.
ⓒ 더숲
  
봄이었고 만나는 즉시 우리는 밭으로 갔다. 송글송글 호밀이 싹을 내밀고 있었고 포도나무 아래는 작은 야생 제비꽃이 잔뜩 피어 있었다. "언니, 이것 좀 봐요. 제비꽃. 너무 예쁘다 너무 예뻐." 연돌이 쪼그려 앉아 제비꽃을 보며 감탄한다. "네가 더 예쁘다 연돌." 이렇게 말하고 나는 노래를 부른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아, 언니 노래 진짜 잘 한다. 조동진보다 더 잘해." 그녀의 말에 나는 으흐흐 웃는다. "우린 그냥 자뻑 자매로 살자."
포도밭에 들어가면 우리는 레돔을 따라다닌다. 일하고 있는 그를 쉴새 없이 부른다. "이쪽으로 와서 가지치기 하고 있는 포즈를 취해 봐. 아니 왜 그렇게 어색해. 평소대로 하라고!" 우리는 배우에게 명령하는 영화감독처럼 허리를 구부려라, 눈을 저 멀리 바라보라, 머리카락을 올려라 등등을 요구한다. 레돔은 쓴 웃음을 지으면서도 시키는 대로 한다. "이제 가도 돼?" 그는 포즈 한번 취할 때마다 묻는다. "아니, 안돼 안돼!" 이렇게 말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못들은 척 저 쪽으로 자기 할 일 하러 가버린다. 우리는 후다닥 그를 따라가며 사진을 찍고 뒷모습을 그리고 앉은 모습을 그린다. "아, 좋아, 이런 느낌. 만화책 나오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자빠질 거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연돌이 킥킥 웃는다.
 
 까탈스런 신 감독의 요구에 별 말없이 응해주지만 끝나기 바쁘게 도망가는 레돔.
ⓒ 신이현
 
밭에서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스케치하는 작업이 끝나면 안으로 들어와 한칸한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번에 적어도 콘티 5화는 하고 가야 해요"라고 결심하지만 3화도 겨우 끝내고 기진맥진 해버린다. 만화라는 작업은 정말 고달프다. 한 페이지당 여섯 개로 나눈 칸에 인물들을 하나하나 박아넣고 말을 하고 굴러가게 해야 한다. 눈알이 빠지고 엉덩이에 좀이 쑤신다. 만화와 글쓰기의 공통점이라면 둘 다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다른 점이라면 만화가 더 노동력이 든다는 것이다. 글이라면 '열 명의 아이가 웃고 있다'라고 쓰면 끝이지만 만화는 열 명의 아이를 그려야 한다.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나는 아이도 그려줘" 이런 주문이 들어오면 다시 지우고 그려야 한다. 그런데도 만화를 그리는 것은 굶어도 좋으니까 하는 것이겠지.

봄의 포도밭과 복숭아 꽃 피는 동네를 그리고 여름의 수박과 장마와 포도송이를 그리고 이윽고 가을이 오기 시작하자 우리는 초조해지지 시작한다. 마감 날은 다가오는데 원고는 아직 한참 밀렸다. 스트레스로 몸살이 나서 진짜 마감날을 못 맞추면 어쩌나. 그러게 남의 돈을 먼저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었어. 제주와 충주를 오가며 일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어. 콘티는 또 왜이렇게 안 풀리지….. 뒤죽박죽 머리를 쥐어짜는 날들이 이어졌다. "언니. 너무 힘들어요. 시어머니가 나를 힘들게 해요. 아들이 나를 힘들게 해요. 남편은 더 나를 힘들게 해요. 우리 남편 갱년기인가요, 맨날 화를 내요."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마감 날짜이다.

"일단 뜨끈한 국밥부터 한그릇 먹자." 우리는 청주 공항에서 만나 양조장으로 오는 길에 추어탕 집에 들린다. 연돌과 나는 모든 것이 다르지만 식성은 같다. 찬음식을 못 먹는다. 뜨끈한 국물을 먹고 나면 "이제 살 것 같다!" 하고 다시 만화 이야기를 시작한다. 양조장으로 가면서도 만화 이야기를 하고 도착하기 바쁘게 밭으로 가서 스케치하고 사진 찍고 안으로 들어와 그리기 시작한다. 머리가 뱅뱅 돌면서 더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한다. "아, 손가락에 힘이 빠져서 안되겠어요." 우리는 산소 결핍에 이른 사람처럼 밭으로 뛰어간다.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잠시 휴식하려는데 거위가 다가온다. "앗, 그려야 해!"
ⓒ 신이현
 
"언니 저 우쿨렐레 연습한 거 들어볼래요?" 이 와중에 베짱이처럼 우쿨렐레를 들고왔다. 산이 보이는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연주를 시작한다. 우쿨렐레 연주 소리를 듣고 거위가 다가오더니 화음을 넣어준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꽥꽥꽥, 그대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꽥꽥꽥,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꽥꽥꽥.

기적처럼 놀라운 2중창에 기운이 나고 머리도 돌아가기 시작하자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해서 궁리한다. "언니, 이제 인스타에서 유튜브로 넘어가야 해요." 인스타를 하게 된 것도 연돌이 권해서였는데 이제 동영상까지 찍어야 하나. "거기까지는 못 가겠다. 너무 힘들다. 그냥 글이나 쓰고 좀 힘들게 살란다. 너나 가라 유튜브." 우리는 깔깔깔 웃다가 넘어가는 해를 보고 놀라서 안으로 들어간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무릎에 힘을 실어야지. 이렇게 서서 기계 시동을 거는 농부가 어딨냐."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내가 잔소리를 한다. "이렇게 말이죠?" 연돌은 묵묵히 다시 그린다. 고운 얼굴에 짜증도 내지 않는다. 시어머니 아들 남편에 이어 나까지 겨우 숨쉬고 있는 만화가를 쥐어짜는 느낌이다. "이번에는 2화밖에 못 끝냈네요. 큰일났어요, 언니." 아들이 갑자기 아프다는 소식에 하루 앞당겨 제주로 가면서 연돌이 마감 걱정을 한다. "뭐 죽기야 하겠냐. 일단 좀 쉬자."

집으로 오니 작업실 책상 위에 마른 풀들이 흩어져 있다. 민트 줄기와 오크라 잎, 쐐기풀과 보리수 가지들이다. 스케치를 하려고 연돌이 밭에서 꺽어온 것들이다. 그 옆에 작은 스케치 공책까지 잊어버리고 갔다. 공책을 열어보니 마른 꽃잎과 줄기들이 잔뜩 꽂혀있다. 다정한 연돌, 공책 속에 그려진 그림들은 하나같이 다정하다. 농부도 다정하고 오크라도 다정하고 닭도 다정하고, 제비꽃도 다정하다. "연돌 그림이 너무 좋아. 마법같아. 난 그만 다정해버렸어."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연돌은 대답은 이럴 것이다. "언니 또 자뻑."
 
 연돌이 그린 양조장 만화. <충주의 맛>(가제)이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 김연수
 
 
▲ 연돌과 나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지만 지금은 충주의 시골 포도밭에서 뒹구는 처지가 되었다.
ⓒ 신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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