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부' 조직중 임정 수립되자 '서로군정서' 창설

김삼웅 입력 2023. 6. 1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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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 29] "한민족이 어찌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

[김삼웅 기자]

 서울 백범기념관 벽에 좌우로 나란히 걸려 있는 이상룡, 이승만 사진.
ⓒ 백범기념관
 
이상룡과 서간도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한족회와 군정부를 조직하면서 무장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장(헌법)이 통과하고 국호를 대한민국, 정체를 민주공화국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초기내각 명단이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

소식을 들은 이상룡은 군정부 윤기섭을 대표로 삼아 상하이로 파견하여 두 기관의 장차 있을 일에 관해 협의토록 했다.

서간도에서 파견된 대표는 임시정부의 인사들과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결정하고 돌아왔다. 

첫째,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을 통제, 지도할 임시정부의 위치는 국제외교상 상해가 적합하므로 그곳에 두도록 한다.

둘째, 무장 독립군의 국내 진입 활동은 만주가 적합하므로 독립군을 지휘할 군정부는 만주에 설립하도록 한다. (주석 4)

이상룡이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고자 서간도에 군정부를 세워 뜻을 펴고자 할 때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굳이 '정부'의 명칭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한민족이 어찌 두 개의 정부를 가질 수 있겠는가? 정부를 상하이에 양보하기로 하고 우리는 "군정부를 군정서로 고치자"라고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이상룡의 의견은 곧 임시정부에 전해졌고 임시정부는 서간도 대표와 타협한 안과 이상룡의 뜻을 1919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에 상정 통과시켰다. (주석 5)

임시정부와 합의에 따라 국내진공 활동의 무장독립군은 만주에 두기로 하면서, 군정부는 명칭을 서간도에 위치한다 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바꾸었다. 

서로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로 운영되었다. 즉 최고지휘부인 독판부 아래에 무장활동을 담당하는 사령부·참모부·참모처 등을 두었으며, 무장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정무청·내무사·법무사·재무사·학무사·군무사 등을 설치하였다. 이 밖에 입법 및 주요 안건의 결정기관으로서 서의회(暑議會)를 두었으며, 지방조직으로는 분서(分署)를 두어 무장독립운동의 효율성을 꾀하고자 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을 보면, 독판 이상룡·부독판 여준·정무총장 이탁·내무사장 곽문·법무사장 김응섭·재무사장 남정섭·학무사장 김형식·군무사장 양규열·참모부장 김동삼·사령관 지청천 등이다. (주석 6)

서로군정서는 정부 호칭은 상하이 쪽에 양보했으나 조직은 여전히 정부형태를 띄고 있었다. 다만 무장 독립전쟁을 위한 부서가 강화되고, 무관학교 출신들이 그 책임을 맡았다. 비슷한 시기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서일·김좌진 등의 북로군장서가 조직되어 서북간도의 양대 독립운동기관이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군사를 육성하려면 막대한 군자금이 필요했다. 한족회 등 한인자치단체들의 헌금이 요청되었으나 교민들 역시 하나같이 생활이 어려운 터라 여의치 않았다. 국내에 비밀요원을 파견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3.1혁명 이후 더욱 살벌해진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으로 접근이 어려웠다.

서로군정서는 군자금의 어려움으로 대규모 군사력보다 게릴라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모집된 군자금과 독립군을 바탕으로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친일세력을 제거하는 한편, 국내로 들어가 적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친일세력 제거 상황에 대해 살펴보면 이것은 서간도와 평북지역을 중심으로 1919년~1922년까지 4년간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은 국내의 친일파 관료, 적의 밀정 및 서간도 지역의 친일단체인 보민회·거류민회 등의 간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친일세력의 제거는 주로 서로군정서의 핵심부대인 의용군 제1중대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부대는 1914년 통화시엔에서 무장부대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던 채찬·신용관에 의해 지도되었다. 이후 채찬 등에 의하여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00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지안시엔·통화시엔 등지에 두었다.

국내에서의 활동은 주로 평안북도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서로군정서가 위치하고 있는 서간도지역과 평안북도 지역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로군정서에서는 1920년 5월 문명식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경북지역에서 관공서 폭파사건을 주도하였으며, 8월에는 미국의원단이 서울에 들어오는 기회를 이용하여 군정서원들이 조선총독의 암살과 적 기관의 폭파 등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주석 7)

주석
4> 채영국, 앞의 책, 141쪽.
5> 앞의 책, 142쪽.
6> 박환, 앞의 책, 83쪽.
7> 앞의 책,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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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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