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축구팬이 무서워하는 강등..그래도 승강제가 좋다

김식 2023. 6. 10.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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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991년 영국으로 유학 가면서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축구를 보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축구 자체보다 이들이 가진 시스템이었다. 매 시즌 성적에 따라 승격(promotion)과 강등(relegation)이 결정되는 승강제 시스템에 필자는 매료되었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프로스포츠는 미국의 프랜차이즈(franchise) 모델을 따르고 있다. ‘폐쇄형 리그(closed league)’라고도 불리는 프랜차이즈 시스템은 지역을 분할해 각 구단에 독점적인 연고권을 부여한다. 이러한 연고권으로 인해 리그에 속한 클럽들은 안정적인 운영을 할 수 있고, 승강제에 비해 연고지 이전이 자유스럽다. 더불어 승격과 강등이 없는 관계로 리그를 구성하는 클럽은 언제나 같다. 

1990년대 프리미어리그(EPL)의 우승 경쟁은 2000년대와 비교하면 참으로 지루했다. ‘어우맨(어짜피 우승은 맨유)’이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는 1부 리그에서 20번 우승해, 리버풀(19회)에 간발의 차로 앞서 있다. 하지만 1992~93시즌 시작한 EPL 초반 역사는 맨유가 작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0년대에 치러진 8번의 EPL 시즌 동안 맨유는 6번이나 우승했다. 우승에 실패한 2시즌마저도 겨우 승점 1이 부족해 준우승에 머물 정도로 강했다. 당시 영국에 있던 한인들은 맨유를 국내 프로야구 1980~90년대의 절대 강자였던 해태 타이거즈에 비유하곤 했다. 

맨유의 1강 체제가 너무 확고하자, 필자는 다른 곳에서 EPL의 재미를 찾곤 했다. 바로 강등권 전쟁이었다. 시즌 내내 이어지던 강등권 전쟁의 생존자는 최종일에 가려질 때가 많았다. 잉글랜드에서는 이 운명의 날을 ‘서바이벌 선데이(Survival Sunday)’라고 부른다. 

레스터 시티는 서바이벌 선데이였던 지난 5월 28일 리그 최종일에 웨스트 햄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뒀다. 에버튼이 최종일 경기를 지거나 비기면 레스터 시티는 극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경기 후 시티 선수들이 에버튼의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사진=옵터스 스포츠 캡쳐  


강등권에 위치한 클럽의 팬들은 서바이벌 선데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곤 한다. EPL의 마지막 10경기가 같은 시간대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한 골 혹은 승점 1이 아쉬운 상황에서 팬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다른 경기장의 스코어를 확인하면서 가슴을 졸인다. 

강등권에 위치한 클럽의 서바이벌 선데이 매치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신선한 충격을 필자는 지금도 기억한다. 90분 내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은 자신의 클럽이 강등되는 순간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계속 박수를 치고 응원가를 부르는 팬들도 있다.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다. 엉엉 우는 팬들도 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끝까지 자신의 클럽을 향해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다.  

강등이 확정된 후 레스터 시티 팬이 슬퍼하고 있다. 이로써 레스터 시티는 블랙번 로버스에 이어 EPL에서 우승하고 강등당한 두 번째 클럽이 되었다. 사진=옵터스 스포츠


“도대체 축구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슬퍼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 그들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게 다가왔다. “얼마나 자신의 클럽을 사랑하면 저런 반응이 나올까”라는 경외심까지 들었다. 그런 축구 문화를 가진 영국인들이 너무 부럽기까지 했다. 

사실 축구에서 강등이란 단어만큼 무서운 말은 없다. 강등당한 클럽의 수입은 확연히 줄어들고, 최고 선수들은 팀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부진이 계속 이어질 경우 클럽은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축구팬이 승강제를 선호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승강제는 모든 팀들에 (상대적으로) 공정한 경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최고의 리그에서 최고의 팀들과 경쟁할 기회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한 팀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축구리그의 경쟁은 불공평하다. 부자 구단이나 대도시를 연고지를 하는 일부 클럽은 그렇지 않은 구단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자보다 훨씬 많은 돈을 쓰는 부자 구단이라도 강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경기를 해서 이겨야 한다. 

이렇듯 최상위 리그에서 경쟁하고 우승에 도전할 기회는 승강제의 모든 축구팀에게 열려 있다. 현실적으로 소규모 클럽이 동화 같은 드라마를 쓰는 경우는 물론 굉장히 드물다. 하지만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존재하는 스포츠 리그와 신분이 영구히 고착화 돼있는 리그는 동기부여 측면에서 구성원들에게 커다란 차이를 줄 수 있다.  

시즌이 일정 기간 진행되면 프랜차이즈 제도의 하위권 팀은 의도적으로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도 있다. ‘탱킹(Tanking)’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클럽은 다음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상위 지명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강제는 리그 최종일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우승에서 멀어진 팀도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나 유로파리그 혹은 유로파컨프런스리그에 출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히 강등권에 위치한 클럽들이 생존하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경쟁은 수많은 드라마와 잊지 못할 순간을 팬들에게 선사하곤 한다. 

축구를 통해 느끼는 감동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최고의 감동은 강등당한 클럽의 팬들이 보여준 모습에서 나왔다. 여러분은 어느 순간에 축구에서 최고의 감동을 느꼈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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