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에 정치적 의미가 생길까 [하재근의 이슈분석]

데스크 입력 2023. 6. 10.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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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6월 20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열린 트럼프 유세장에 케이팝 팬덤의 노쇼 시위로 빈자리가 많았다.ⓒAFP=연합뉴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었다.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이 오클라오마주 털사에서 중요한 유세행사를 하기로 했다. 트럼프 측은 많은 사람들이 운집할 거라고 자신했는데 의외로 행사 당일에 빈자리가 많아 화제가 됐다.


더 화제가 된 건 이 사건의 배경으로 케이팝 팬들이 거론됐다는 점이다. 케이팝 팬들이 유세를 망치기 위해, 유세 입장권 예약 공지가 뜨자마자 입장권 신청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일에 가지 말자고 모의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케이팝 팬들의 털사 유세 노쇼 사태다.


케이팝 팬들은 인터넷망을 활용해 이런 의사소통을 했고, 공화당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모의한 게시물들을 지웠다고 한다. 이런 모의가 실제로 털사 유세 흥행 실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미국에선 화제가 됐다. 당시 민주당 스타 정치인이라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이 "K팝 동지들이여, 정의를 위한 투쟁에 헌신해 줘서 고마워(KPop allies, We see and appreciate your contributions in the fight for justice too)"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 측에서 생일을 맞아 축하 메시지를 요청했는데 케이팝 팬들이 케이팝 가수의 영상을 대량으로 전송해 생일 분위기를 망치기도 했다. 미국 댈러스 경찰이 흑인 인권 시위 관련 불법 사례를 신고해달라고 하자 케이팝 팬들이 일제히 신고앱에 접속해 서버를 다운시킨 사건도 있었다. 케이팝 팬들은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는 흑인 인권 운동을 지지했기 때문에 경찰 서버를 공격한 것이다.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백인 목숨도 소중하다(White Lives Matter)'며 흑인 인권 시위에 반대하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자, 케이팝 팬들이 같은 해시태그로 케이팝 영상을 대량으로 올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운동을 무력화하기도 했다. 당시 케이팝 팬들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지 말라. 이는 옳지 않다. 대신 우리 가수 얼굴이나 보고 가라"와 같은 메시지도 올렸다. 이것은 이른바 ‘해시태그 납치 사건’으로 불렸다.


외국에서 케이팝 팬들이 이런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면서 케이팝에도 정치적 이미지가 생겨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선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한류 케이팝은 대부분 아이돌 음악인데, 아이돌 음악은 철저히 상업적인 상품이며 그 속에 아무런 정치성도 없다는 게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케이팝과 정치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칠레, 태국, 미얀마 등의 지역에서 시위대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블랙핑크의 ‘킬 디스 러브’, 로제의 ‘온 더 그라운드’와 같은 케이팝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2019년 칠레 반정부 시위 때 정부 측에서 ‘케이팝 팬들의 반정부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새로 집권한 칠레 대통령은 트와이스 정연의 사진을 SNS로 공유하며 케이팝 팬들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케이팝 팬들이 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젊은이들은 기성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분출할 때 마침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음악이 케이팝이라면, 케이팝이 그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현장에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독자적인 운동가요, 저항적 청년문화의 전통이 약한 곳에선 더욱 케이팝이 활용될 여지가 크다.


운동가요와 청년문화의 전통이 있는 곳에서도 새롭게 나타나는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기존 운동흐름과 다르다면, 노래도 케이팝으로 바뀔 수 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2010년대에 이화여대 시위에서 소녀시대의 노래가 불린 적이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케이팝을 즐기는 사람들은 대체로 타 문화에 개방적이거나 소수자일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우월주의를 주창하면서 다양성 이슈가 첨예한 전선이 됐다. 많은 케이팝 팬들이 자연스럽게 백인우월주의 반대편에 서게 됐다. 이런 과정에서 케이팝과 정치성이 엮이게 된 것이다.


케이팝의 내용과 별개로 케이팝의 존재 자체가 비영어 아시아 음악으로서 다양성 이슈에서 정치적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 방탄소년단의 ‘러브 유어셀프 토크 유어셀프’ 캠페인도 다양성 이슈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기획사가 만들어낸 상업적 아이돌 음악과 관련해 해외에서 이런 흐름이 나타난 건 앞에서도 언급했듯 놀라운 일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하기 어려웠고 앞으로의 전망도 쉽지 않다. 각국의 청년들이 케이팝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달린 문제다. 만약 케이팝이 국제적으로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음악으로 자리 잡는다면, 케이팝 팬층이 더 넓어지고 각국의 평단이 케이팝을 바라보는 시각도 전향적으로 개선될 수 있겠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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