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날 좀 보소

2023. 6. 1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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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질꼬질한 얼굴을 씻으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에게는 두 눈이 있어 하늘 높이 떠 있는 별과 구름은 물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까지도 볼 수 있건만 어째서 내 모습만은 실제로 볼 수 없단 말인가. 거울 속에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생물체 역시 나이기는 하지만, 납작하게 눌린 허상을 올록볼록한 현실의 나와 견줄 수 없는 노릇이다. 만일 유체 이탈이 가능하다면 내 눈으로 스스로를 직접 볼 수 있겠으나 안타깝게도 신묘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탓에 애꿎은 거울만 들여다볼 뿐이다.

그런데 뚫어질 듯 거울을 응시해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 있다. 눈치도 없이 귓구멍 초입까지 마중 나온 귀지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정수리에 자리 잡은 비듬과, 엉덩이 부근에 말라붙어 점심 식사로 쌀밥을 먹었음을 증명하는 밥풀이 그렇다. 그것들은 달의 뒷면과도 같아서 제 모습을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늘, 외출하기에 앞서 사뭇 진지한 자세로 거울 앞에 서서는 달 탐사에 나서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훑는다. 제 몸을 구석구석 살피는 거울 속 납작한 인간의 모습이 볼썽사납기는 하지만 지저분한 비밀을 지구인들에게 들키는 것보다야 낫다.

약속이 있는 날에는 탐사에 더욱 공을 들인다. 아는 언니와 점심 약속이 있었던 그날 역시, 온몸을 꼼꼼하게 살핀 끝에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급작스레 엉덩이에 가려움을 느껴 풍경을 즐기는 척 두리번거리다가 주위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전광석화처럼 그곳을 할퀴었다. 그러던 중 바지가 떡하니 터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깊은 산골짜기까지 샅샅이 탐색하지 않은 나의 실수였다. 나는 수치심으로 바들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최대한 조신한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가 바지를 갈아입었다.

“언니,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오늘따라 차가 왜 이렇게 막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스러운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는 나를 언니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동안 묵혀 왔던 이야기보따리를 와르르 풀어놓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했다. 도대체 이놈의 바지는 언제부터 터져 있었던 것일까. 지하철 계단을 성큼성큼 오를 때, 길을 걷다 허리 숙여 신발 끈을 묶을 때, 요가원에서 선생님께 예의 바르게 인사할 때, 터진 바지 사이로 누군가 내 속옷을 본 건 아닐까. 이런저런 망상으로 괴로워하던 그때, 언니가 수줍게 고백한 남편과의 에피소드가 나의 귀를 사로잡았다.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코털이 삐죽 튀어나와 있더란다. 너무 추잡스러워 보이기에 빨리 자르기는 해야겠는데 자그마한 미용 가위가 보이질 않아 꿩 대신 닭으로 문구용 가위를 손에 쥐었단다. 그걸 콧구멍에 욱여넣고서는 코를 이리저리 찡긋거리며 코털 처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거울에 남편 얼굴이 비치더란다. 세상에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하는 남편의 표정에 잠시 얼어버렸지만 결국 함께 포복절도하고야 말았단다. 언니는 이어 말했다. “나 혼자였으면 그냥 잊고 넘어갔을 자질구레한 일이잖아. 그런데 그걸 남편이 봐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된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언니의 말이 잊히지 않아 자꾸만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어렴풋이 알게 됐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며 수치심은 나누면 웃음이 된다는 사실을. 수치심을 나눌 이가 없는 나는 크고 작게 웃을 기회를 매일매일 놓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신이 인간을 만들 적에 두 눈으로 세상 만물을 다 보아도 제 모습만은 볼 수 없게 만든 이유는, 나를 동지섣달 꽃 본 듯 바라봐 줄 다른 이를 만나 오순도순 재미나게 살아가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체 이탈을 하는 것과 나를 지켜봐 줄 사람을 만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실현 가능성이 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두 요원하기만 하다. 할 수 없이 오늘도 거울 앞에 선다. 고개를 도리도리하며 귓구멍을 들여다본 후, 꾸벅 인사를 하며 정수리를 살펴본 다음, 뒤돌아선 채 상체를 힘껏 비틀어 엉덩이 부근의 밥풀 유무를 확인하고서는, 마지막으로 무릎을 구부려 스쾃을 하며 바지가 터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본다. 이상한 체조를 하는 내 모습이 애처로웠나. 거울 속 납작한 인간이 쓰게 웃는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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