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리큐에게 물어라| 칼은 내려놓고 무릎걸음으로 겸손하게…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6. 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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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로지 아름다움에만 머리를 조아린다.”

(참인지 아닌지 모를) 이 문장 한마디에 목숨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 일본 다도의 다성(茶聖·차의 성인)으로 추앙 받는 센노리큐다.

센노리큐의 스토리를 담은 영화 <리큐에게 물어라>는 폭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아침, 리큐의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군사들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탁월한 미의식으로 일본 다도를 이끌었던 리큐는 그의 굽히지 않는 성정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기를 거스르고 결국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스스로 배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리큐에게 아내 소온은 이렇게 묻는다.

“나리의 마음속에는 항상… 다른 여인이 있었나요?”

(자세한 내용은 책과 영화에서 확인하시길…. 영화 <리큐에게 물어라>는 야마모토 겐이치가 쓴 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소설은 140회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나오키상 수상은 일본 대중문학 작가에게는 최고의 영예로 여겨진다.)

센노리큐. 성은 센(千)이요, 리큐는 이름이라기보다는 하사받은 칭호다. 센과 리큐 사이에 존칭 ‘노’를 붙여 센노리큐라고 부른다. 영화에서는 “리(利)는 날카로운 날이요, 큐(休)는 휴식이다”라는 설명이 나온다.

오사카 아래쪽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 ‘사카이’에서 태어난 리큐의 본명은 센 요시로다. 원래 오다 노부나가 사람이었던 리큐는 노부나가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연을 맺고 히데요시의 차 선생님 겸 다두(茶頭·차를 끓이는 소임을 맡은 사람)가 된다.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황에게 차를 진상하는 ‘다도회’를 연다. 당시 일본 다도의 1인자로 추앙받던 리큐였으나, 그의 원래 계급인 상인의 신분으로는 성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천황이 이때 ‘리큐’ 호칭을 하사했고 그 때부터 ‘센 리큐’라 불렸다. 이후 사람들이 성 뒤에 존칭 ‘-노’를 붙여 센노리큐가 됐고, 그렇게 ‘센노리큐’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다.

히데요시의 총애를 받고 늘 히데요시의 찻자리에 함께했던 센노리큐가 어쩌다 히데요시 명에 의해 할복하게 됐을까. 몇 가지 이유가 얘기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차를 대하는 시선과 방식이 너무 달랐다는 분석이다.

센노리큐가 일본에서 다성이라 불리는 것은 센노리큐가 완성한 ‘와비사상’이 지금껏 일본 다도계를 지배하는 철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와비(侘び)’는 ‘한가로우면서도 간소하고 검소한 아취’ 정도로 정리해볼 수 있다. 화려함과 고급짐만을 좇던 당시의 세속적인 가치관을 부정하는 동시에 금욕주의에 가까웠다.

센노리큐 할복의 단초가 된 교토 대덕사 금모각(사진 위) 2층에는 아직도 리큐의 목상이 보관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 네네가 히데 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인 고대사 한편에 위치한 다실 시우정. 센노리큐 가 만든 다실을 옮겨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선생이었던 센노리큐

리큐 후손들 ‘우라센케’ ‘오모테산케’ 등 일본 다도 본산

센노리큐의 와비 사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그가 만든 ‘대암다실’이다. 1951년에 일본 국보로 지정된 대암다실은 1평 남짓한 크기에 다다미만 깔끔하게 깔려 있을 뿐 겉치레가 없다. 백미는 다실에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가로 세로 1m 정도 크기의 문이다. 이 문을 통해 다실에 들어가려면 허리를 굽히고 무릎걸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지라는 의미를 담았다나. 그뿐인가. 당시 일본 무사들이 차고 다니던 장검은 아예 걸려서 들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장검을 다실 앞에 내려놓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들어가서는 좁은 공간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불편하게 앉아 차를 마셨다. “다실에 들어오는 사람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겸손하게 들어와야 할뿐더러, 다실 안에서는 어떠한 위협도 느껴서는 안 된다”라는 리큐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결과물이다.

센노리큐는 그 ‘와비사상’ 덕분에 지금껏 일본의 다성으로 존경받지만, 동시에 그 와비사상 덕분에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오사카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다실이 남아있다. 히데요시는 심지어 이동할 수 있는 황금다실을 만들어 어디에 가든 황금다실을 가져갔다고. 전쟁터에서도 마찬가지다. 병사들이 자리를 잡고 진지를 만드는 와중에 히데요시 거처 옆에 늘 황금다실이 세워졌다.

히데요시는 매일 밤 그곳에서 각종 진귀한 다구를 감상하며 차를 마셨다. 황금다실을 못마땅하게 여긴 센노리큐가 이에 대해 몇 번 얘기를 하면서 히데요시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 밖에도 히데요시가 센노리큐의 딸을 첩으로 요구했는데 이를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설, 센노리큐가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설, 센노리큐가 히데요시의 동생인 히데나가와 함께 세력을 형성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책에서는 히데요시가 리큐가 지닌 조선 향합을 탐냈는데 리큐가 그걸 진상하기는커녕 보여주지도 않아 분노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밉다고 무조건 자결을 명할 수는 없는 법. 직접적인 계기는 교토에 위치해 있는 대덕사(다이토쿠지) 삼문의 리큐 목상이다. 대덕사 맨 앞쪽에 위치한 삼문은 원래 1층이었는데, 센노리큐가 시주한 돈으로 삼문 위에 2층을 올리고 금모각이라 이름 붙였다. 대덕사 주지는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센노리큐 목상을 만들어 금모각 2층에 들여놓았다.

대덕사에 들어가려면 금모각 1층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느 날 히데요시는 “내가 센노리큐 사타구니 아래로 걸어 들어가야 하느냐”라며 화를 냈고 그때부터 센노리큐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결국 자결당했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센노리큐는 그러나 지금까지 일본 다도계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남아있다. 센노리큐는 첫째 부인과 사별한 후 자신의 다도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소온’이라는 여인과 재혼한다. 당시 소온에게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소안이 있었는데, 센노리큐는 소안을 거두고 자신의 친딸과 결혼시켰다. 센노리큐의 친아들 도안은 후사가 없이 사망했고, 센노리큐 딸과 결혼한 의붓아들 소안이 후계를 이었다. 소안의 후손들은 지금 일본 다도계를 아우르는 삼천가 (三千家)를 이루는데 우라센케(裏千家), 오모테센케(表千家), 무샤코지센케(武者小路千家)다. (일본 다도 영화로 유명한 <일일시호일>은 그중 오모테센케에서 다도를 20여 년 배웠던 모리시타 노리코의 얘기다.)

그에 비하면 히데요시의 사후는 비루하기 그지없다. 아들이 셋 있었지만 장남과 차남은 2살 남짓 어릴 때 사망하고 히데요시 뒤를 이은 셋째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21살에 도쿠카와 이에야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결한다. 그렇게 히데요시는 대가 끊긴다. 자녀가 없던 정실부인 네네는 히데요시 사후 의붓아들인 히데요리 대신 도쿠카와 이에야스 편을 든다.(너무나 당연한 일일 수도.)

덕분에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전권을 잡은 후에도 네네를 예우해줬고, 네네가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고대사(고다이지)’ 절을 짓겠다 할 때도 적극 후원한다.

일본 다도의 핵심인 ‘말차’는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음료와 디저트에 활용된다
중국 다기 아닌 조선 ‘이도다완’을 제일로 친 센노리큐

화려하고 세련된 美 대신 소박하고 고졸한 美 추구

청수사 올라가는 길 닌넨자카, 산넨자카가 시작하는 인근에 위치한 ‘고대사’에서도 센노리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사 한편에 산정(傘亭·가라카사테)과 시우정 (時雨亭·시구레테)이라 이름 붙은 다실이 있는데 이 다실이 바로 센노리큐가 지은 다실이다. 네네가 센노리큐와 히데요시의 인연을 추억하며 센노리큐가 지은 다실을 고대사로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고대사 초입에는 유방암(遺芳庵·이호안)이라 불리는, 초코송이 같은 지붕을 지닌 깔끔하고 근사한 다실이 자리 잡고 있다. 에도 초기 교토의 거상이며 차를 사랑하는 다인이었던 하이야 소에키가 부인을 위해 지은 다실이다. 190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나. 정갈하게 가꿔지고 다듬어진 유방암에 비하면 시우정과 산정은 지극히 소박하고 아무런 꾸밈이 없다.

‘센노리큐’식 다실의 특징을 다시 한 번 한눈에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고대사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유방암이 나오고 유방암을 지나 오른쪽으로 쭉 걸어 올라가면 “이게 정말 다실이 맞나?” 싶은 쓰러져가는 정자 같은 것이 나타난다. 한편에 조그맣게 쓰인 ‘시우정’ 팻말이 아니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 만한 풍경이다.

다시 영화 얘기로. 원작을 쓴 야마모토 겐이치는 리큐가 평생 가슴 속에 한 조선 여인을 담고 살았다는, 일종의 픽션을 끼워 넣었다. 중국 다기가 아닌 조선 이도다완을 제일로 치고 그의 다실이 회칠을 하는 대신 흙 토벽을 그대로 드러내는 등 조선의 ‘소박한 미’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무래도 센노리큐가 조선 문화를 흠모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나름 근거 있는 상상에 기반해 만들어진 내용이라고. 조선 여인 얘기는 허구일지라도, 리큐가 조선 문화에 호감이 있었던 것은 어쨌든 사실인 듯하다. 리큐에게 물어볼 수는 없지만.

교토 센노리큐 흔적을 찾아…
교토에서 센노리큐의 흔적을 찾는 이들이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시우정과 산정을 볼 수 있는 고대사와 금모각이 있는 대덕사다.

교토 다도의 본산 정도로 여겨지는 대덕사는 꼭 금모각이 아니어도 찾을 만한 이유가 여러 가지다. 대덕사는 30만 평가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에 수많은 암자와 정원이 흩어져있는 구조인데 료겐인·다이센인·즈이호인·고토인 등 4곳의 정원이 특히 유명하다.

그중 즈이호인은 가레산스이(물을 사용하지 않고 바위와 모래, 이끼를 통해서 정원을 표현하는) 양식 정원이 특히나 아름다워 사랑받는다. 즈이호인에는 여경암·평성대암·안승헌 등 3곳의 다실이 있다. 이 중 평성대암은 센노리큐가 만들었다는 그 대암다실을 복원한 다실이다. 평소에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한편 여경암에서는 매달 1번씩 오모테산케 다회가 열리는데 그때만 문이 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대덕사 고봉암에는 일본 국보 26호 ‘기자에몬 이도(이도다완·15~16세기 조선 남해안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 사발, 일본에만 200여 점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가 소장 되어 있다. 이 또한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는다. 일본 다인들은 평생 한 번만이라도 이 다완을 보는 것이 꿈이라나.

대덕사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묘도 있다. 묘 옆쪽 총경원이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는 곳이다.

교토 북쪽 다도박물관 인근에는 우라센케와 오모테센케 본산이 있다. 고급 단독주택을 연상케 하는 두 곳의 본산은 평소 웅장한 문으로 닫혀있고, 역시 일반인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 교토에서 맛만 본 아쉬움은 오사카 남쪽 센노리큐 생가가 위치한 사카이에서 조금이나마 달래볼 수 있다. 센노리큐 생가 앞에는 근사한 ‘센노리큐 기념관’이 자리하는데, 한편에 대암다실을 그대로 본떠 만든 모형다실이 있다. 30분마다 돌아오는 회당 2명씩 들어갈 수 있다. 모형다실이지만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눈에만 담고 와야 한다.

교토 ‘우라센케’ 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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