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전쟁의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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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우리 집에서도 나와 아내의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경보음을 울렸다.
서울시가 지난달 31일 오전 6시41분 발송한 '위급재난문자'는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가 발령됐으니 얼른 대피할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서울시 문자를 그대로 옮겼을 뿐인 속보에는 모두가 "대체 어디로 대피하란 말이냐"며 답답함과 공포를 호소하고 있었다.
서울시 경보가 '오발령'이었다는 행정안전부발 위급재난문자가 똑같은 경보음을 울리며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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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우리 집에서도 나와 아내의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경보음을 울렸다. 서울시가 지난달 31일 오전 6시41분 발송한 ‘위급재난문자’는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가 발령됐으니 얼른 대피할 준비를 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일단 피하라고 소리치고 있으니 그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무슨 일인지 검색해 보려는데 네이버는 먹통이었다. 몇 번을 새로 고침하고 앱을 껐다 켜보는데도 텅 빈 화면은 채워질 줄 몰랐다. 전쟁 발발로 계엄령이라도 떨어져 통신망을 끊은 것인가. 하지만 유튜브, 인스타그램 같은 것들은 다 작동하고 있었다. 통신을 죄다 끊은 게 아니라면 특정시설만 공격을 받은 것인지 모른다. 네이버는 사실상 기간시설이다. 내가 모르는 시간,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정말 큰일이 벌어진 걸까. 닫힌 창밖 저 멀리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확성기 안내방송이 대남 선전방송 같은 톤으로 긴장감을 높이고 있었다. 이렇다 할 정보가 없었다. 아내가 켠 거실 TV에서는 “북한이 우주발사체를 쐈다”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추정된다” “일본은 오키나와에 대피령을 내렸다” 이런 파편 같은 설명만 되풀이됐다. 그들도 더는 아는 게 없었다. “물을 사놔야 하나.” 아내가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전쟁에 대한 공포를 실감하기는 처음이었다. 3년차 기자였던 2010년 연평도 포격 사건 땐 전쟁이 내 삶을 훼손할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전시 상황에서 취재하고 기사로 써야 할 산더미 같은 일들만 버거웠다. 이번엔 그런 직업적 부담보다 생존의 부담이 컸다. 전쟁의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아비규환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지인들은 “가족이 생겨서” “지켜야 할 게 있어서” 그런 걸 거라고 했다. 회사 선배의 남편은 출근 도중 ‘대피령’ 문자를 받고 처자식 걱정에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지난해 4월 동료 기자들과 부실한 민방위 대피소 실태를 고발하고 정부는 대대적으로 후속 조치를 내놨는데 1년이 넘도록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아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도 차량용 구급키트를 미리 사놓지 않은 일이 미안해졌다. 어느 정도까지 짐을 챙겨야 하나. 대피를 준비하라는 말은 짐을 싸란 소리 아닌가. 전쟁이 났다면 집에 놓고 온 게 있다고 다시 돌아올 여유는 없을 것이다. 서울시 문자를 그대로 옮겼을 뿐인 속보에는 모두가 “대체 어디로 대피하란 말이냐”며 답답함과 공포를 호소하고 있었다.
오전 7시3분. 서울시 경보가 ‘오발령’이었다는 행정안전부발 위급재난문자가 똑같은 경보음을 울리며 날아왔다. 서울시는 불쾌해했지만 엉터리 경보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울을 혼란에 빠뜨린 건 경계경보를 울린 사실이 아니라 경계경보‘만’ 울린 사실이다. ‘왜’와 ‘어디로’가 없는 경보였다. 놀란 시민들이 인터넷으로라도 확인하려고 우르르 네이버에 접속했고, 이 때문에 네이버가 먹통이 되면서 불안감이 증폭됐다. 당국은 ‘우주발사체’라고 강조했는데 왜 미사일도 아닌 우주발사체 때문에 경계경보가 울려야 하고 시민들은 대피까지 해야 하는지 지금껏 설명이 없다.
그날 아침 22분간은 전쟁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 의미가 있다. 민방위 훈련이었다고 치자. 잠시나마 한껏 고조됐던 전쟁의 공포가 가시고 어떤 이들은 일상의 소중함을 새삼 환기했을 것이다. 우려스러운 건 이번 해프닝으로 앞으로는 이런 경보에 우리가 반응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요란하게 시늉만 하는 경보 시스템은 위험한 법이다.
강창욱 산업2부 차장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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