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의 책으로 읽는 세계]디지털 미래, 직접 살아보니 별로였다

입력 2023. 6. 8. 14:13 수정 2023. 8. 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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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 사회
무한한 자유 유토피아 아닌 고립의 디스토피아
일상 속 아날로그 소중한 깨달아

6월5일, 미국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서 애플의 연례 개발자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애플은 스키 고글과 비슷한 기기 하나를 새로 선보였다. 헤드셋 컴퓨터인 비전 프로(Vision Pro)였다. 머리에 이 기기를 뒤집어쓰면 주변 풍경이 눈앞에 보이고, 그 위로 여러 가지 애플리케이션(앱)이 증강현실 형태로 나타난다. SF 영화에서 자주 본 것처럼 3차원 공간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애플의 신제품 MR 헤드셋 '비전 프로' [사진제공=연합뉴스]

눈동자, 손가락, 목소리로 작동하는 비전 프로는 사용자에게 아날로그 현실과 디지털 현실이 뒤섞여 작동하는 혼합현실(Mixed Reality) 체험을 제공한다. 오감을 사용하는 이러한 컴퓨터의 출현은 우리가 이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컴퓨터를 이용하도록 만들고, 사용자의 몰입감을 높임으로써 결국 현실과 가상 사이의 장벽이 무의미해지는 디지털 세상을 빠르게 앞당긴다.

아날로그적 과거를 몰아내고 우리 삶을 디지털 미래를 향해 밀어붙이는 혁신 기계들이 속속 등장할 때마다 세상엔 익숙한 예언, 즉 디지털 천국 예찬도 함께 반복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모바일 컴퓨터와 전기차, 메타버스(확장가상세계)와 블록체인 등으로 이뤄진 세계가 우리 삶을 더 행복하고 건강하며 똑똑하고 풍요롭게 변화시키리라는 찬송이 곳곳에서 울려 퍼진다.

‘디지털이 할 수 없는 것들’(어크로스)에서 데이비드 색스는 장밋빛으로만 물들어 있는 우리의 디지털 미래에 먹물을 끼얹는다. 재택근무, 원격 수업, 스트리밍 문화, 온라인 쇼핑, 화상 회의 등으로 이뤄진 새로운 일상이 과연 우리 삶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의심한다.

색스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은 먼 미래 일로 여기던 디지털 중심 세상이 우리 삶을 실제로 어떻게 변화시킬지 보여준 인류사적 실험이다. 감염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사무실 대신 집에서 업무를 보고, 가게와 상점 대신 온라인 쇼핑으로 음식과 물건을 배달했으며, 극장에 가는 대신 거실에서 스트리밍 공연을 즐기고, 아이들은 교실 대신 화면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러자 디지털 찬양대는 뉴노멀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고, 인류가 낡아 빠진 아날로그 일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아날로그 세계는 별로 힘을 잃지 않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힘이 다소 약화하자마자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포기했고, 상점과 식당은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학교는 아이들을 다시 교실로 불러들였다. 디지털 일상의 전면 지배는 순식간에 거품처럼 잦아들었다. 색스는 말한다. "디지털 미래가 도래했다! 그런데 참 별로였다."

이 책은 전 세계 전문가와 시민 200여명을 인터뷰해서 지난 세 해 동안의 디지털 미래를 비판적으로 재구축한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가 계속 일하고 공부하고 소통하고 쇼핑하게 해줬으나 우리 삶을 더 나은 쪽으로 이끌진 못했다. 디지털 중심의 삶은 무한한 자유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숨 막히는 고립의 디스토피아에 가까웠다.

재택근무와 화상 회의는 아주 짧은 기간에 우리 삶에 강렬한 해방감을 불어넣었다. 많은 기업이 전면 재택근무를 선언했고, 디지털 협업 도구를 제공하며 20세기 유물인 사무 공간을 영원히 추방하겠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재택근무는 혼잡한 출근길, 비좁은 사무실, 불편한 복장, 상사의 감시와 편애, 노골적 성차별과 인종차별, 불필요한 눈치 보기, 영혼 없는 인간관계를 해결할 수단처럼 느껴졌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에게 장차 업무에만 집중하고 능력으로만 평가받는 회사 생활을 열어줄 듯했다.

그러나 환상이었다. 재택근무가 지속되자 국적, 나이, 경력, 업종에 상관없이 문제가 불거졌다. 일하는 시간은 길어지고 성과는 떨어졌다. 일과 가정이 분리되지 않으면서 불안과 우울은 심해지고, 공허감과 탈력감은 늘어났다. 인간관계가 약해지고 대화와 잡담이 없어지자 업무는 지루해지고 안녕감을 잃었다.

일이란 단순히 업무가 아니라 인간관계가 포함된 복합 경험이다. 무수한 일상을 공유하고 쓸데없는 잡담이 쌓여 있는 관계에서만 인간은 중요한 무언가를 포착해서 주고받을 수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말처럼 창조는 집단 활동이다. 아이디어가 펼쳐질 든든한 장(場)이 없으면 혁신은 시작도 할 수 없고, 믿음직한 동료들이 없다면 창의적 아이디어와 헛소리는 구분되지 않는다. 소통을 주고받으면서 신뢰 관계를 쌓아주는 업무 공간 자체가 지식 창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학교 역시 단지 지식만 가르치고 학습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디지털 미래는 화상 학습을 이용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하면 교실 없는 교육이 가능하고 개인별 맞춤 교육을 통해서 학습 효율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기술은 교육을 거의 구원하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에 학교 교육은 파행을 거듭했다. 학생들은 수업에 온전히 참여하지 못했고, 더 적게 배웠으며, 성적도 떨어졌다. 특히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학생들 학습 격차로 나타났다. 교사의 보살핌이 줄어들자 학생들 의욕이 떨어지고, 수업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심각했다. 학교생활에는 교실만큼이나 복도가, 수업만큼이나 쉬는 시간의 소통이 중요했다. 마음을 맞대고 삶을 나누는 경험을 장려하지 못할 때, 더 나은 교육은 불가능하다.

1909년 영국 작가 E. M. 포스터는 ‘기계가 멈추다’라는 단편 소설에서 디지털 미래가 가져올 끔찍한 일상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벌집 모양 방에 갇혀 혼자 살면서 버튼 하나로 음식, 대화, 강의 등 필요한 욕구를 해결한다. 작가는 이러한 삶의 잠재적 위험을 일깨운다. "기계는 발전한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방향은 아니다."

비전 프로처럼 혁신적 경험을 제공하는 디지털 기술은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놀라운 기술도 우정과 사랑, 돌봄과 보살핌 등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경험의 중요성을 줄이진 못할 테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보완하기보다 대체할 때 좋은 삶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것이 코로나19 팬데믹의 핵심 교훈이다. 색스는 말한다. "디지털 기술보다 아날로그를 앞에 둬야 한다. 내가 살고 싶은 미래는 인간적인 욕구와 갈망과 경험을 최우선에 두는 세상이다."

장은수 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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