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눈에 이슬이..." 좌절된 시도, 그럼에도 유의미한 이유

김경준 입력 2023. 6. 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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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강 문일민 평전] (23) 중앙청 할복 의거 3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 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김경준 기자]

 문일민의 할복을 보도한 1947년 10월 26일자 <조선일보> 기사. "독립은 아직 멀고 민생은 날로 도탄에 빠지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 조선일보
 
1947년 10월 25일 중앙청에서 한국 독립을 호소하며 문일민이 할복하자 많은 시민들이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관련 기사: "조선독립이 안돼 죽는다"... 자결 시도한 독립운동가, 그 내막 https://omn.kr/23yi9 ).

한 시민은 "애국자를 살리겠다"며 문일민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와 헌혈했고, 동국대학교 사학부에 재학 중인 여학생 최계량은 병문안 후 아래와 같은 다짐의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문 지사(志士)의 장행은 국내적으로 세 가지의 의도로써 관행되었다고 믿습니다. 첫째 현재의 부패한 사회현상을 통감하여 개혁하기 위함이요, 둘째 독립운동이란 이렇게 해야된다는 즉 철저하게 몸과 마음을 바쳐야 된다는 가르침이며, 셋째 먹을 것 없고 입을 것 없고 살 곳 없는 우리 겨레의 사실을 죽음으로써 군정당국에 호소하는 것이오! 민족 공동책임으로서의 죽음을 차지고 장행하시던 그 순간을 겨레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의 희기로서 살란 의무가 있다고 믿으며 결심하는 바입니다." -  <독립신문> 1947년 11월 6일자

당시 언론에서 문일민을 의사(義士)·지사(志士)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문일민의 행동이 한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다.

불과 2개월 뒤 문일민의 할복 의거를 모방한 사건도 벌어졌다. 1947년 12월 24일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임기수(林基秀)라는 26세 청년이, 조국의 독립이 여전히 먼 것을 개탄하고 청년들의 각성을 일으키고자 할복자살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해당 사건을 보도하면서 '제2의 문일민 사건'이라고 소개했다.

"김구 선생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한 기자의 회고

한편, 문일민의 할복은 해외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에게도 놀랄 만한 소식이었다.

문일민의 할복 소식을 접한 직후 조소앙은 다음과 같은 한시(漢詩)를 남겼다고 한다.

老髮衝冠六十翁 늙은 모발 관을 치는 예순 살 노인
忍命可忍剖心胸 목숨을 아낀다면 차마 심장을 가를 수 있으랴
追隨先烈君先逝 선열을 따라 그대가 먼저 가버렸으니
痛恨半生孰與同 통한스럽네, 남은 반생 누구와 함께 할까

조소앙은 문일민이 절명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로 사건 직후 문일민의 사망 오보가 보도됐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문일민의 할복 소식을 접한 직후 조소앙이 남긴 한시. 시문에 '사형(舍兄) 소앙 선생이 문일민 동지가 할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회가 있어 지은 시'라는 표현과 함께 끝에 '시원(時元)'이라는 필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문 자체는 조소앙이 짓고 글씨는 동생 조시원(趙時元)이 쓴 것으로 보인다. (한국정신문화원 발간 <한국학자료총서 5: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에 수록된 것을 직접 촬영)
ⓒ 김경준
 
이후 응급수술 끝에 문일민이 극적으로 소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조소앙·원세훈 등은 문일민이 입원한 병실에 찾아와 "문씨를 이렇게 한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요,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들도 죽어 마땅하오"라고 하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일보> 조덕송 기자가 훗날 40여년 뒤 기사를 통해 회고한 바에 의하면, 김구는 병상에 누워있는 문일민을 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말없이 문일민씨의 병상으로 다가가더니 의식불명인 채 누워있는 문씨의 얼굴을 우두커니 들여다보았다. 그때 김구 선생의 눈에는 분명히 이슬이 맺혀 있었다. (…중략…) 침통함으로 감싸인 문일민씨의 병실은 그야말로 임정 요인들로 가득 차 잠시 임시정부를 그 방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 <주간조선> 1988년 1월 24일자

일찍이 김구 역시 자주독립정부 수립이 좌절될 경우 저항의 수단으로 자결하는 방법을 고민한 바 있다. 그런데 문일민이 직접 행동에 나섰으니 김구가 받은 감동과 충격은 자못 컸을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사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엄항섭 역시 11월 8일과 9일 양일에 걸쳐 <독립신문>에 글을 기고했는데, 문일민의 행동을 을사늑약 당시 자결한 민영환의 행동에 빗대면서 문일민을 '의사'라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그날이야말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정거장에서 거의한지 제38주년 기념일의 밤"이라고 하여 문일민이 의거를 결행한 날짜의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다만 안중근 의거는 1909년 10월 26일에 있었고, 문일민이 할복한 날짜는 10월 25일이기에 엄항섭의 표현에는 착오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느냐"라는 엄항섭의 말처럼 문일민 역시 10월 26일의 의미를 알고 그에 맞춰 의거를 결행하려 했던 것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다만 26일은 일요일이라 군정청 직원들이 근무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부득이하게 하루 전에 거사를 도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엄항섭은 "문 의사는 우리를 격려하며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하기 위하야 충천의 기세로써 정의의 깃발을 또 한 번 높이 든 것"이라며 "다같이 문 의사를 존경하며 그의 희생적 정신을 배우자"라고 역설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었다.
 
 1947년 11월 9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엄항섭의 기고문. 문일민을 '의사'라고 표현했다.
ⓒ 국립중앙도서관
 
한편 문일민이 속해있던 국민의회에서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문의사원호임시위원회(文義士援護臨時委員會)를 조직해 적십자병원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문일민의 치료 회복을 적극 지원했다.

"애국자가 존경 못 받는 국가, 위기가 잠복"... 친일 청산을 호소하다

중앙청 할복 의거의 주인공이었던 문일민은 거사 후 2개월여가 지난 시점에 이르러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12월 20일자 <독립신문>에 '동지동포께 일언(一言)함'이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함으로써 자신이 할복한 까닭을 밝힌 것이다.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 아래 인용한 글은 깨지거나 빠진 글자, 현대 맞춤법에 어긋난 부분들이 많아 전체적으로 현대 문법에 맞게 다듬고 빠진 글자들 역시 문맥에 맞게 임의로 추가했음을 밝힌다 - 필자 주)

"돌이켜 남한의 형편을 보면 그것도 아름답지 못하니 친일파의 블럭은 곳곳에 발호하고 있다. 민족반역자의 세력은 군부 방면에까지 벌써 뿌리를 깊이 박혔다. 그들은 표창까지 받는다.

우리의 위대한 최고지도자 김구 주석은 도리어 그들의 비시(卑視)나 냉소를 받게 되며 심지어 그들의 모략적 중상으로 인하여 무식군배외자(無識軍排外者: 무식하게 외국을 배척하는 자), 국제형세역행자(國際形勢逆行者: 국제 형세를 거스르는 자) 등등의 모욕까지 당하고 있다.

김 주석도 이런 꼴을 당하시거든 그외의 애국자야 더 말할 것 있으랴. 모든 혼란과 분열도 그들이 제조하는 것이다. 애국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그 국가는 위기가 잠복하는 법이다.

비록 노둔(魯鈍)한 일민이라도 생명을 홍모(鴻毛: 기러기의 털만큼 아주 가벼움을 의미함)로 생각한지는 오랜지라. 감히 민충정공(민영환을 의미)과 같이 자문(自刎: 스스로 자신을 찔러 죽음)함으로써 애국동포의 정신을 환기하려 하며 할복까지 하였던 것이다."

즉 문일민은 30년 가까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온 조국의 현실이 38선으로 나뉘어 있는 현실,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이 곳곳을 장악하면서 오히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온 애국자들이 모욕을 당하는 남한의 현실에 개탄하며 애국동포의 정신을 환기할 목적으로 의거를 결행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포부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민은 위대한 김구 주석의 명을 받들어 다시 죽을 길을 속히 찾기 위하여 더욱 굳게 결심하였는데 과연 우리가 독립을 완성할 길은 김 주석의 발자취를 따르는 데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잘난 체 하지 말고 김구 주석의 지도 아래 뭉치자. 김 주석은 독립운동에 있어서 정로(正路)만을 걸어왔거니와 입국한 이후에도 반탁에 성공하였고 한국 문제를 UN에 상정시키는 데 또 성공하였다. 그는 이제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써 통일자주의 우리 정부를 수립하기를 주장하고 있는 바 이것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단독 정부는 조국 분열과 외력(外力) 의존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방법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되지 아니할 것이며 동포의 생존도 가망이 없는 까닭이다. 더구나 국제의 역량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집중한 때에 단정론을 주창하는 것은 결국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아니하랴."

문일민은 김구의 지도 아래 온 국민이 뭉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는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반탁 및 통일 정부 수립 노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칭 임시정부 시절 반(反) 한국독립당 세력이던 문일민이 해방 정국에서 한독당에 입당하게 된 까닭을 풀 수 있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문일민의 행보를 보면 사실 그는 반(反) 김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김구의 통일 정부 수립 노선에 공명하여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데서 추정해볼 수 있다시피, 문일민은 사사로운 인연이나 감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문일민의 통일 정부 수립 노선 지지는 근본적으로 그가 중국 망명 시절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부터 견지해왔던 안창호의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실천하기 위한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의와 사상을 막론하고 한민족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대공주의는 해방 후 통일 정부 수립운동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1948년 5월 10일 김구와 함께 한 문일민(오른쪽)
ⓒ 독립기념관
   
중앙청 할복 의거의 의의

문일민의 중앙청 할복 의거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김구를 비롯한 통일정부론자들은 단정 수립에 절대 반대했지만, 당시에는 이미 남북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이 UN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부하자 1948년 2월 26일 UN소총회에서는 임무 수행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제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됐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남과 북에 각각 대한민국 정부(남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정부가 수립되면서 통일 정부 수립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비록 중앙청 할복 의거가 단독정부 수립으로 흘러가는 국내 정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몸을 던져 한국인들을 각성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그 자체로 크나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특히나 문일민 의거에 자극받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또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문일민은 할복 당시 김구와 김규식 앞으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통일독립을 이룩해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는데, 두 사람은 점점 한반도의 형세가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북한의 지도자들과 직접 담판을 짓기로 결심하고 1948년 2월 김두봉·김일성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가면 못 돌아온다"는 군중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그해 4월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다.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목숨을 건 북행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문일민의 유혈 호소 역시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게 아니었을까.

2023년 올해로 중앙청 할복 의거는 76주년을 맞는다. 그러나 문일민이 자신의 배를 갈라 피를 뿌려가며 호소했던 '친일 청산'과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겨레의 숙원은 7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중앙청 할복 의거의 의의를 곱씹어봐야 할 이유다.

- 24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조선일보>, <경향신문>, <독립신문>, <대동신문>, <동아일보>
조덕송, <民族 大드라마의 証言> 2·3, 《주간조선》, 1988.1.17~24.
<韓國學資料叢書 5: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 篇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해외사료총서 6: 러시아연방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소련군정문서, 남조선 정세 보고서 1946~1947>, 국사편찬위원회, 2003.
장규식, <미군정하 흥사단 계열 지식인의 냉전 인식과 국가건설 구상>, 《한국사상사학》 38, 한국사상사학회, 2011.
선우진,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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