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의 Epi-Life]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서지영 2023. 6. 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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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나이가 들어 머리에 든 게 많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속담입니다. 어리고 잘 몰라도 인간은 모름지기 겸손해야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겸손 강조’로 해석하는 것에는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만, 겸손을 굳이 ‘고개를 숙인 벼’에 비유한 것에서 저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겸손을 해야 한다고 고개까지 숙일 것은 아니니까요.

말 한마디에 어디론가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하는 시대가 있었지요. 그때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은 침묵과 굴종을 강요당하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권력에 고개를 숙이는 비굴함을 굳이 겸손이라고 해석하면서 살아야 했던 이 땅의 ‘먹물’들이 내뱉은 푸념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제가 사회적 발언을 자주 해서 그런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제게 들려주는 사람들이 생기더군요. 이를 어떻게 대응할까 궁리를 하다가 떠오른 것이 보리입니다.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지요. 그래서 제가 만들어낸 속담은 이렇습니다.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이 신생 속담에 저는 제 입장을 붙여서 설명을 합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 거, 맞습니다, 맞구요. 그런데, 우리는 쌀만 먹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보리도 먹어요. 쌀이 부족한 시절에는 보리를 더 많이 먹었어요. 익은 보리 보셨어요?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습니다. 까끄라기도 까칠하게 보리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지요. 여러분은 벼 하세요. 저는 보리 하겠습니다.”

생명력으로 보자면, 벼는 보리를 못 따르지요. 보리는 한겨울 언 땅에서도 버팁니다. 하얀 눈 아래에서 푸릇푸릇합니다. 봄이 올똥말똥할 때에 보리밟기를 해야 합니다. 자근자근 밟아주어야 보리는 잎을 올립니다. 웬만큼 가물어서는 보리를 못 죽입니다.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은, 겸양 따위 챙길 수 있는 여유의 삶이 보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는 처신 잘하는 양반 같고, 익어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보리는 꺾이지 않는 민중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보리밥 먹을 때도 양반 밥 먹듯이 하면 맛이 안 납니다. 보리밥은 비벼야 합니다. 커다란 양푼에다가 있는 나물 다 넣고 비빕니다. 고추장도 좋고 된장도 좋고 청국장도 좋습니다.

평소 먹는 것의 두어 배는 되게 비벼서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서 보리밥을 가득 밀어넣어야 합니다.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보리밥은 먹는 게 아니라 밀어넣는 겁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여야 제대로 밀어넣은 겁니다. 그 눈물로 보릿고개를 떠올리면 다행한 일입니다.

6월입니다. 보리를 벨 때입니다. 보리 베고 그 자리에 모를 냅니다. 타작을 끝낸 보리는 ‘햇보리’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깔릴 것입니다. 햅쌀이 맛있듯이 보리도 햇보리가 맛있습니다. 햇보리에는 신선한 곡물의 구수한 향이 있습니다. 보리를 거두고 바로 장마와 더위가 이어지므로 신선한 보리로 버티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보리밥을 제대로 먹자면 지금 먹어야 합니다.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겉보리 서말도 없다는 것은 매우 궁핍한 처지에 있다는 뜻입니다. 겉보리는 ‘맛없고 값싼 곡물’을 대표합니다. 겉보리밥은 맛이 특이합니다. 겉이 끈적해 입안에 달라붙고 여물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농민은 주로 찰쌀보리를 재배합니다. 찰쌀보리는 이름만 보리이지 쌀밥에 섞이면 쌀 같습니다.

가끔 겉보리가 당깁니다. 100% 겉보리의 꽁보리밥이 당깁니다. 겉보리 꽁보리밥에다가 열무김치에 청국장을 넣고 비벼서 입안에 밀어넣기를 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보리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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