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작두, 신칼... 대장장이가 만든 무속용품들 [정진오의 대장간 이야기]

정진오 2023. 6. 8.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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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오의 대장간 이야기17] 대장간과 무속인

[정진오 기자]

 어디를 가나 대장간의 단골손님 중에는 무속인이 있다. 무속인과 대장간 철물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은데, 굿을 할 때 쓰는 도구 중에 대장간이 아니고서는 구하기 어려운 게 제법 있다. 삼지창, 작두, 칼이 대표적이다.
ⓒ 정진오
어디를 가나 대장간의 단골손님 중에는 무속인이 있다. 무속인과 대장간 철물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은데, 굿을 할 때 쓰는 도구 중에 대장간이 아니고서는 구하기 어려운 게 제법 있다. 삼지창, 작두, 칼이 대표적이다. 웬만한 대장간 상품 진열대에는 커다란 삼지창 한두 개씩은 전시해 놓기 마련이다. 

무인(武人)들이나 쓸 것 같은 이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강철 창이 무속인용이다. 작두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대장간에는 작두를 맞추려는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몰려든다. '신칼'이라고 하는 무속인들이 춤을 출 때 쓰는 칼도 대장간 작품이다.

삼지창의 크기는 다양하다. 굿을 한다든지 제를 지낼 때 희생 동물을 떠받쳐 놓거나 찌르는 데 쓴다. 작두는 풀이나 짚, 약재 같은 걸 써는 도구인데 굿에서도 이용한다. 영험함을 드러내기 위해 작두를 사용한다. 이때의 작두는 두 개를 한 조로 삼는 쌍작두가 있고, 하나만 쓰는 외작두가 있다. 

맨발로 날카로운 날을 밟고 올라선다. 이걸 일러 작두를 탄다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발을 다치는 수가 있다. 대장간에서는 작두의 날이 날카롭지 않고 무디면 오히려 타는 사람이 발을 다친다고 말한다. 날카로울수록 다치지 않는다는 다소 믿기 어려운 말이 맞을까 싶기는 하다. 어쨌든 작두 만드는 대장간에서는 날을 벼리는 데 특별히 신경을 쓴다. 

칼은 양손에 들고 춤을 출 때 쓴다. 말 그대로 칼춤용이다. 무속인이나 대장간에서는 신칼이라고 부른다. 희생 동물을 찌르는 용도로도 칼을 사용한다. 굿에 쓰는 칼의 종류는 다양하다.

무속은 원시 종교의 한 갈래로 이어져 왔다. 굿을 하는 사람을 보통 무속인이라고 부른다. 무당이라고도 하는데 무속인들은 이 표현을 꺼린다. 무당은 순우리말이기도 하고 '巫堂(무당)'이라는 한자를 빌려서 쓰기도 한다. 이때의 '巫(무)'라는 글자 모양이 샤먼이 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방울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무당은 여성을 일컫고, 남성일 경우에는 박수라고 한다. 박수는 한자로 '격(覡)'이라고 쓴다. 2016년 개봉했던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哭聲)>에서 배우 황정민이 연기한 일광이 박수이다. 황정민의 굿 장면이 얼마나 생동감 넘치고 신들린 듯했던지 실제 무속인들도 넋을 잃고 볼 정도였다.

무속인들도 놀란 영화 <곡성> 황정민의 연기
 
 인천의 한 굿당에서 무속인이 작두를 타기 위해 발을 벗고 준비하고 있다. 2023년 4월 3일.
ⓒ 정진오
 
 영화 <곡성>(2016)에서 일광 역을 맡은 배우 황정민.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중국의 성씨 중에는 원시사회부터 제사를 주관하던 제사장에서 비롯된 축(祝), 무(巫), 복(卜) 씨 등이 있다. 신에게 제사 드리는 직업을 성으로 삼은 거다. 직업이 성이 된 경우는 영어권에서도 많이 있다. 대장장이를 일컫는 'smith(스미스)'에서 smith라는 성씨가 나왔다. smith라는 성을 쓰는 사람들의 조상을 찾아 올라가면 그 원류는 대장장이였다고 봐야 한다. 요즘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성씨가 smith라고 한다.

신령스럽다고 할 때의 '영(靈)'이란 글자는 비가 내리기를 비는 무당의 모습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래선지 천문기상을 살피던 누대를 영대(靈臺)라고 했다. 영대는 신령스러운 마음이나 정신을 뜻하기도 한다.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맞이하느냐 흉년이 드느냐의 문제는 오로지 하늘에 달려 있었다. 오랜 가뭄으로 대지가 타들어 갈 때 성난 민심은 궁궐을 향하게 마련이다. 왕이 정사를 잘하지 못하는 바람에 하늘이 노해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거다. 따라서 가뭄에 비를 내려달라고 비는 기우제는 국가적 대사였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에는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유난히 많다. 왕이 직접 사찰에 가서 악기를 두드리며 비를 빌기도 했고, 무당을 집단으로 동원해 빌기도 했다. 그것도 200~300명씩 불러모았다. 재난 상황을 벗어나고자 무당에게 크게 의존한 거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의 지배 계층에서는 많은 사람이 무당을 싫어했고, 왕에게 무당을 쫓아낼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동국이상국집>의 이규보(1168~1241)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규보는 <노무편(老巫篇)>이라는 글을 지어 왕궁이 있던 개경에서라도 백성들의 풍속을 어지럽게 하는 무당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규보는 그러면서도 영험한 진짜 무당과 그렇지 않은 가짜 무당을 구분했다. 이규보는 중국 황제(皇帝) 때의 신무(神巫)인 계함(季咸)을 신기롭다면서 높이 평가했다. 자신이 살던 시대에는 그를 이을 만한 무당이나 박수가 나오지 않고, 그저 신이 내린 몸이라고 거짓소리를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가짜 무당 천지라고 보았다.

무당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과 그러면 안 된다는 쪽의 치열한 로비 대결도 <고려사절요>에는 적혀 있다. <고려사절요> 인종 9년(1131년) 8월 기록에 보면, 일관(日官)이 "근래에 무당을 믿는 풍속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면서 무당을 내쫓을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왕은 조서를 내려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쫓겨날 위기에 처한 무당들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서로 은병(銀甁) 100여 개를 거두어 권세가에게 뇌물로 주고 청탁했다. 그 권세가는 왕에게 "귀신이란 게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어떤 게 진짜인지 헛것인지는 알지 못한다"면서 무당들을 옹호했다. 그러자 왕은 그 말을 그럴듯하게 여겨 좀 전에 내렸던 무당 금지령을 늦추었다.

'OO 작두장군', 'O 보살'로 불리는 경관
 
 인천의 한 굿당에서 무속인이 작두를 타기 전에 쌍작두를 조립해 놓은 모습. 여기에 네 귀퉁이를 하얀색 천으로 단단히 묶어서 움직이지 않게 한 뒤 작두 대 위에 얹어 놓으면 무속인이 작두를 탄다. 2023년 4월 3일.
ⓒ 정진오
 
 인천의 한 굿당에서 본 신칼. 아랫쪽의 길다랗게 생긴 두 개가 신칼이라 부르는 칼이다. 윗쪽 두 개는 흔히 볼 수 있는 부엌칼. 2023년 4월 3일.
ⓒ 정진오
조선시대에는 더했다. 동아시아 종교사 연구자인 한승훈이 2021년에 펴낸 『무당과 유생의 대결』에는 책 제목처럼 조선시대 무속인과 새로운 국가 지배 이념인 성리학에 몰두하는 유생(儒生)들의 치열한 다툼이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그려진다. 

무당들은 궁궐 깊숙이 파고들어 나라 살림에 끼어들기도 했으며, 그와는 정반대로 유생들에게 또는 권력 핵심에 의해 천시받으며 쫓겨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그야말로 무속 신앙과 유교 교리의 대결이 끝없이 전개되었다. 저자 한승훈은 무속을 민속종교로 분류한다.

그 오랜 부침 속에서도 무속 신앙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3일 인천의 한 굿당에서는 작두 타는 무속인의 굿이 펼쳐졌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인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의 전승교육사가 굿을 이끌었고, 그를 신엄마라고 부르는 제자가 이날 굿을 주관했다. 작두도 주관자가 타게 되어 있었다. 굿 주관자를 '경관'이라고 칭했는데, 그 경관은 'OO 작두장군', 'O 보살' 등으로 불렸다.

굿당 안 정면에는 온갖 과일을 3단, 4단으로 올려 쌓은 상이 커다랗게 마련되어 있었고, 벽에는 다양한 장군들의 초상이 빨강, 노랑, 파랑 등의 색깔로 그려져 있었다. 굿판에는 장구와 징을 치는 연주자들도 앉아 있었다. '장군 부르는 노래'가 15분 정도 길게 이어졌는데 노래에 등장하는 여러 장군 중에는 이순신 장군도 있었다.

굿을 주관하는 무속인은 양손에 신칼을 들고 제자리에서 뛰고, 돌고 하면서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작두 타는 곳은 바깥에 따로 마련해 두었다. 작두는 땅바닥에 있는 게 아니라 150cm 정도 되는 높은 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쌍작두였다. 

무속인은 계단을 올라 작두 위에 발을 올렸다. 작두 받침은 건장한 장정 둘이서 흔들리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맨발의 무속인이 작두에 올라섰고, 날 위에서 발자국을 이리저리 떼었다. 이 굿을 작두거리라고 했다.

작두거리가 끝나자 타살거리가 이어졌다. 타살거리의 희생 동물은 돼지였다. 큰 돼지 1마리를 8개 부위로 해체해 늘여 놓고 삼지창과 칼을 꽂았다. 팥떡도 여러 시루에 나누어서 했다. 이날 굿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된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가게를 연다든지 할 때 액운을 막고 행운을 빌기 위해 음식을 차려 놓고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를 고사(告祀)라고 부른다. 고사에 초대받은 손님은 삶은 돼지머리를 향해 절을 한 뒤 돼지 입에 돈 봉투를 끼우며 주인을 격려하고 성의를 표시한다. 굿이나 고사에서 제사상에 돼지머리를 올리는 관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돼지고기를 '굿거리 음식'으로 썼던 오래된 전통
 
 인천의 한 굿당에 세워 놓은 삼지창. 2023년 4월 3일.
ⓒ 정진오
 
 이규산 장인이 운영하는 <영흥민속대장간> 진열대의 삼지창 두 개.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눈에 전라남도 나주목의 촌민들이 산신에게 제사 지내는 잔치 모습이 잡혔다. <매월당집>에 실린 <금성사(錦城祠>라는 시에 '돼지 족발(豚蹄)'이 등장한다. 

이 돈제(豚蹄)라는 한자어를 <매월당집>을 번역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고전국역편집위원회에서는 '돼지 발쪽'으로 해석했다. 쉬운 말로 돼지 족발이란 건데, 이와는 달리 심경호 교수의 <김시습 평전>에서는 발굽(蹄)이라 하지 않고, 그냥 다리로 보았다. 그 대목을 읽어보자.

'장구와 북으로 일 년 평안을 기원하고(缶鼓祈年樂) 돼지 다리로 풍년 들기를 비누나(豚蹄祝歲穰)'.

제사를 지내는 동네 사람들은 왜 요즘처럼 돼지머리를 쓰지 않고 돼지 다리를 올렸을까. 아니면 돼지머리도 있고, 돼지 다리도 있었는데 김시습이 그냥 돼지 다리만 언급한 것은 아닐까. 김시습이 보았던 대로, 돼지 발굽(豚蹄)을 '돼지 다리'로 볼 것이냐, '돼지 발쪽'으로 해석할 것이냐는 좀 더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옛말에 '돈제양전(豚蹄穰田)'이란 표현이 있다. 돼지 발굽을 바치며 풍년을 빈다는 뜻이다. 베푼 것은 적고 바라는 것은 많음을 빗대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김시습이 읊은 '돈제축세양(豚蹄祝歲穰)'과 같은 의미이다.

김시습보다 100년쯤 뒤에는 드디어 돼지머리가 상량식 고사에 오른다.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 1575년 11월 21일 자와 22일 자에 상량제를 위해 담양 부사가 돼지머리 1개를 보내왔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돼지 족발이든 돼지머리이든 아무튼 돼지고기를 굿거리 음식으로 썼던 전통은 아주 오래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앞에서 얘기한 지난 4월 3일 인천의 한 굿당에서 펼쳐진 타살거리에서는 돼지머리도 있었고, 돼지 다리도 모두 있었다.

시인 백석의 시(詩)에 등장하는 '작두 타는 무당'
 
 인천의 한 굿당에서 본 각종 칼. 맨 위에 언월도 형태의 칼이 보인다. 2023년 4월 3일.
ⓒ 정진오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 <인일철공소>의 송종화 장인이 무속인으로부터 주문받은 작두를 완성해 신문지로 포장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송종화 장인은 날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작두를 타는 무속인이 발을 다치지 않는다고 역설적인 얘기를 해주었다. 2022년 11월 1일.
ⓒ 정진오
무당이 작두 타면서 진행하는 굿은 시인 백석(1912~1996)의 작품 소재로도 쓰였다. 백석은 1935년 11월에 발표한 '산지(山地)'란 시(詩)에서 '아랫마을에서는 애기무당이 작두를 타며 굿을 하는 때가 많다'고 노래했다. '산지'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시인이 고향 마을 풍경을 카메라 셔터를 누르듯 그려낸 시다. 

고향 마을 옆 동네에 애기무당이 있었는데, 그 애기무당이 용하다는 평이 많았던지 작두 타는 굿 의뢰가 잦았던 듯하다. 애기무당이 탔다는 작두는 아마도 그 동네 어귀에 있던 대장간에서 날을 아주 날카롭게 해서 만들었지 싶다. 애기무당이 발을 다치지 않도록.

백석이 애기무당의 작두 타기를 노래한 바로 그 시기, 서울 근처의 한 무당집에서 굿하는 장면이 서양인의 화폭에 그대로 담겼다. 우리나라를 자주 드나들며 옛 우리 모습을 그려 수많은 작품으로 남긴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무당(The Sorceress)'이다.

수채화 작품인 <무당>에는 방안에서 춤을 추는 무당과 그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시선까지 세세하다. 신기한 듯 바라보는 어린 여자아이, 무서워서 우는 남자아이의 모습도 잡아냈다. 굿을 벌이는 큰 방과 그 옆방, 그리고 큰 방에 딸린 부엌도 그려 넣었다.

작가는 무당을 시중드는 노파와 부엌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에 대해서도 별도의 설명글로 자세히 풀어냈다. 그 둘은 무당이 부리는 노비였을까. 제법 길게 쓴 작가의 얘기대로라면 노비처럼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무당에게 노비를 바치는 일이 많았다는데, 이게 사회 문제가 될 정도였다. 

조상의 혼을 그림으로 그려서 무당의 집에 모시고 기도를 올리도록 하고, 그 대가로 상당한 재물을 제공했다. 특히 조상을 모시는 일을 돕도록 노비를 헌납하기도 했다. 이를 신노비(神奴婢)라고 했다. 노비 처지에서 보자면, 할 일 많은 양반 대갓집보다는 무당집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했을 것 같기는 하다.

15세기, 정확히는 1443년 세종 25년 의금부에서는 무당에게 조상 섬기는 제사를 맡기는 것과 노비를 바치는 일을 금지하도록 했다. 이런 얘기가 앞에서 예로 든 책 『무당과 유생의 대결』에도 소개되어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찾아갔던 무당집의 노파와 소녀가 그 집에서 일하는 노비였다면, 이는 신노비 관행이 중앙정부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유지되어왔다는 점을 증명하는 거다.

한딱까리, 넋두리, 푸념, 뒷전... 무속에서 나온 용어들
 
 무속인이 기도처에 세워 놓고 촛불을 켜두는 집. 지붕과 벽체는 스테인리스 재질이고 앞면은 유리로 만들어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 <인해대장간> 작품이다. 2023년 2월 13일.
ⓒ 정진오
조선시대 지배층을 이룬 성리학자 중에는 무당을 부정적으로 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었다. 무당의 능력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 '무격(巫覡)' 편에는 귀신처럼 앞일을 알아맞히고 아픈 데를 낫게 하는 아주 용한 무당 2명의 이야기를 실어놓았다. 

이들 중 평안도에 산다는 무당은 신내림을 하기 전에는 일자무식이었다는데, 한나라 승상 황패(黃霸)의 귀신을 접해서 무당이 되었다고 소개한다. 글자조차 모른다는 그가 어찌 황패라는 기원전 시기의 중국 인물을 알았는지, 아니면 실제로 황패의 신내림을 받은 것인지 무척 궁금하기는 하다. 양반 계층에서 황패는 청렴하고 공정한 관리의 표본으로 여기던 인물이다.

군대 생활도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그야말로 하루를 맞는 일로 시작해서 맞는 일로 끝맺는다고 할 정도로 구타나 얼차려가 다반사였다. 상급자들이 하급자를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때리거나 식기 세척장에서 '엎드려 머리 박고 뒷짐 지는' 얼차려를 시킬 때 '한딱까리'란 표현을 썼다. 

나중에 안 얘기이지만 이 '한딱까리'가 '한 푸닥거리'의 준말이었다. 푸닥거리는 무당이 간단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잡귀를 풀어먹이는 굿이다. 누군가 귀신 탓으로 여겨지는 병에 걸렸다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함으로써 환자의 병을 푸는 일을 풀어먹인다고 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는 무당이 하는 굿과 관련된 게 의외로 많다. '넋두리'나 '푸념'이란 말은 원래 무당이 죽은 사람의 넋을 대신해서 하는 말을 가리킨다. 어떤 가게를 자주 찾는 손님을 '단골'이라고 하는데, 이 단골이라는 말도 굿을 할 때 늘 정해 놓고 불러 쓰는 무당을 일컫는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라는 말 속의 떡이 계면떡인데, 무당이 굿을 끝내고 구경꾼에게 나눠 주는 떡을 말한다. '뒷전으로 밀렸다'고 할 때의 뒷전도 무당의 굿 열두 거리 가운데 마지막 거리를 가리키는 데서 나왔다. 이 '뒷전'을 제목으로 뽑은 굿 관련 책도 나왔다. 민속학자 황루시의 <뒷전의 주인공>이다.

무당과 관련된 말이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예부터 우리네 일상에서 무속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일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낸 문학작품에서는 무당 이야기가 비교적 많이 다뤄지는 편이다. 

조선 숙종 때를 배경으로 한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서는 열두 거리 굿 장면이 상세히 펼쳐진다. 신딸 봉순이가 송도 덕물산 산신 최영 장군을 모셔 들이는 대목이라든지 그 밖의 여러 장면에서 대장간 물품인 삼지창과 언월도가 등장한다. <장길산>의 굿 장면이 어찌나 자세한지 읽는 이가 마치 굿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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