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던 거인, 열한번째 테러에 스러지다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 2023. 6. 8.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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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7] 여운형의 죽음에서 본 해방전후 좌·우익의 패착

윤태옥(답사 여행객)

 몽양 여운형의 묘소
ⓒ 윤태옥
 
펜스와 정문이 1미터 남짓으로 야트막해 다가서는 사람을 편하게 맞아준다. 더 가까이 다가서면 눈에 들어오는 휘호는 血濃於水(혈농어수, 피는 물보다 진하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작은 돌을 던지는 듯하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 106-1에 있는 여운형의 묘소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623-2에는 여운형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여운형의 남겨진 생과 사의 거리는 직선으로 35킬로미터밖에 되진 않지만 역사에서 그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훨씬 깊고 아픈 골짜기가 놓여있다.

여운형은 1886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학문을 공부해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고 솔선하여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었다. 나라가 망하자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1932년 석방된 이후 그의 족적은 조선중앙일보, 조선농구협회, 조선축구협회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일제가 패망하던 바로 그날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세웠고 이후 조선올림픽위원회,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다가 1947년 7월 19일 테러로 사망했다. 그날의 죽음은 해방 이후 그가 당한 열한 번째의 테러였다. 여운형은 해방과 건국의 공간에서 좌우합작의 대표 인물이었다. 여운형의 당한 열한 번의 피습일지를 펼치면 1945~47년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제 패망 이후 26일, 운명의 시간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일제가 패망한 그해 8월 15일부터 미군이 중앙청에 성조기를 게양한 9월 9일까지의 26일은 식민지에서 점령지로 운명이 바뀐 조선에겐 절체절명의 기회였다. 길윤형 한겨레 기자는 이 시기를 집중 분석해 <26일 동안의 광복>(2020)을 펴냈다. 그는 "당대를 살았던 이들은 자신의 양심과 손익 계산에 따라 최선의 판단을 내렸지만, 결과는 끔찍한 파국"이라고 탄식했다. 파국의 하나는 건준의 좌우합작 실패다.

일본의 항복이 결정되자 조선총독부는 중도좌파인 여운형과 우파인 송진우에게 각각 치안협조를 요청했다. 송진우는 거절했지만 여운형은 중도우파인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하여 8월 15일 당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은 그날 송진우를 두 번 만났고, 16일 우파의 이인이 여운형을 찾아 다시 논의했으나 성과 없이 끝났다. 일제강점기 좌파와 우파는 갈등의 골이 깊었다. <동아일보>의 송진우와 <조선중앙일보>의 여운형은 견원지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와중에 18일 새벽 1시경 여운형은 1차 테러를 당해 시골로 요양을 가야 했다. 일제의 탄압이 패전으로 급정거를 하자 '우리들 사이의 테러'가 시작된 것이다.

여운형 부재 중에도 부위원장 안재홍은 우파 영입방안을 강구했다. 그러나 건준의 좌파, 특히 박헌영의 재건파가 강하게 반발했고 8월 24일 미군이 38선 이남을 접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를 계기로 좌파에 눌리고 밀리던 우파는 건준을 향해 거친 반격을 시작했다. 9월 4일 건준의 좌우합작은 실패를 선언했다. 항일투쟁이란 명분과 조직력에서 앞선 좌파는 미군 진주에 대처해,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했다. 헌법 초안도 없었고 공중의 합의절차나 과정도 없다시피 했다. 미군은 9월 9일 서울에 들어왔고 오후 4시 조선총독부의 항복문서를 접수했다. 중앙청에는 일장기가 내려오고 성조기가 올라갔다.

그렇게 조선은 자신의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를 갖추지 못한 채 패전국 영토를 전리품으로 취하러 온 점령군을 맞았다. 이때 건준이 좌우합작의 단일한 정치조직으로서 미국과 소련을 상대했었어도 우리는 한국전쟁으로 치달았을까. 안재홍은 당시를 회고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좌우 쌍방이 국제정세에 너무 우원(愚遠)했고 사대주의적이었다"고. 이런 순간에 9월 7일 저녁 여운형은 두 번째 피습을 당했다. 운 좋게 행인들의 도움으로 구출됐다.

미군이 진주하고 우여곡절 끝에 임시정부는 11월 23일 뒤늦게 귀국했다. 김구는 미군에게 '정부나 정치기구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굴욕적인 각서를 써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여운형은 세 번째 피습을 당했다. 12월 초 휴양 차 들른 백천 옥천여관에 괴한이 침입했다. 누군지 알 듯 모를 듯한 그들은 집요했다.
 
 여운형 생가 기념관 전시물
ⓒ 윤태옥
 
1945년 12월 16일부터 열흘 동안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이 열렸다. 신탁통치 5년 방안이 알려지자 조선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동아일보>가 '소련은 신탁통치,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이라는 대형 오보를 내는 바람에 '반탁'은 어처구니없이 반소 감정으로 폭발했다. 우파가 좌파에게 찬탁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정국은 요동쳤다. 그런 와중에 1946년 1월 여운형을 대상으로 네 번째 테러가 있었지만 출타 중이라 모면했다.

미국은 1946년 2월 우익 인사 중심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을 설치했다. 미국은 여운형을 초치했으나 불참했다. 그에 맞서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단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을 결성했다. 민주의원-민전이라는 좌우대립 구도를 증강시켰다.

3월말 서울에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애초 합의는 불가능했다. 미국은 "1차 목표는 소련의 한국 지배를 막는 것이고, 수년 내로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친소정부 수립이 확고한 목표였던 소련 역시 임시정부 각료 명단(1946.3.15)까지 훈령으로 내려보냈다. 수상 여운형, 부수상 김규식 박헌영. 소련이 임시정부 수반으로 거론했기 때문일까. 여운형은 1946년 4월 18일 관수교 위에서 괴한들에게 또 습격을 당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터뜨려 당시 최대 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 검거령, 체포, 피신, 월북이란 말이 남한에 불꽃처럼 튀었다. 민전도 지하로 들어갔다. 혼란 속에 민전 공동의장 여운형은 북으로 가서 조만식, 김일성 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모색했다. 이후에도 다섯 차례 방북해 어떻게든 좌우-남북 합작을 이루어보려 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고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외치고 나왔다. 여운형은 통일은 자율적으로 하되 정부는 국제협조 하에 수립하자며 5월 25일 중도우파 김규식과 우파 원세훈과 함께 좌우합작을 위한 회동을 가졌다. 그리고 5월 하순 밤 10시경 종로에서 여섯 번째 습격을 당했다. 격투가 벌어졌고 행인들이 여운형을 구출했다. 좌우합작은 죽임을 당할 일이라는 뜻이었을까.

여운형과 김규식은 허헌 김원봉과 회동하며 좌우합작의 외연을 넓혀가던 중 7월 17일 일곱 번째 테러를 당했다. 이번에는 괴한들이 신당동 야산으로 납치했으나 벼랑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미군정 경무부는 암살 미수범 3명을 체포했으나 이들의 처리는 오리무중이었다. 

좌우합작의 여정
 
 여운형이 피살 당시 입었던 피묻은 옷.
ⓒ 윤태옥
 

여운형은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우파에서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 좌파에서 성주식·정노식·이강국이 참여했다. 양측을 중재해 좌우합작 7원칙을 10월 7일 발표했으나 이날 여운형은 여덟 번째 테러를 당했다. 자택 문 앞에서 4명에게 납치돼 2일간 감금됐다가 스스로 결박을 풀고 탈출했다. 영화라 해도 이렇게 지겹도록 반복되는 테러 스토리를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운형을 향한 테러는 픽션보다 지독했다.

이어 1947년 3월 17일 여운형의 자택 침실이 폭파됐으나 무사했다. 5월 12일 저녁 서울 혜화동에서 그가 타고 있던 자동차에 총탄이 날아들었다. 범인은 체포됐으나 처리는 또다시 흐지부지됐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20일 서울에서 열렸다. 7월까지 협의단체에 반탁 단체를 넣느냐 마느냐로 입씨름만 질리도록 했다. 미소건 남북이건 좌우건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점령국의 정책이 그러했으니 합의될 리 없었다.

운명의 날이 닥쳤다. 1947년 7월 19일 '좌우합작 파괴'만이 민족의 살 길 또는 자신들의 생존 필수조건이라고 여긴 누군가가 열한 번째 테러를 가했고 여운형은 숨을 거두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위원회는 구심점을 잃었다. 9월 17일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고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체됐다. 끈질긴 테러에도 여운형은 끈질기게 살아났지만 결국 그렇게 죽었다. 그리고 좌우합작도 죽었다.

누가 여운형을 죽였나    
ⓒ 봉주영
 

내부가 단합해야 외부적인 분단압력에 그나마 버텨봤을 것이나 내부가 이리도 심하게 대립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크게 보면 통합 정치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 말기는 차치하더라도 독립운동에서도 그랬다. 국내외 민족유일당 운동도 실패했다. 신간회 해체는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임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열이었다. 오죽하면 1944년 목숨 걸고 일본군에서 탈영해 임정을 찾아간 장준하는 "다시 일본 항공대가 되어 임정 청사를 폭격하겠다"며 절규를 했을까.

항일투쟁을 피로 물들이며 조선의 좌파는 선명성과 조직력이 몸에 배었다. 좌파의 진짜 조직력은 우파를 끌어당겨 품는 것이어야 했다. 우파는 지식과 교양과 재산이 있었으나 투쟁을 우회하거나 아예 친일로 붙어버렸다. 우파의 진짜 목소리는 기득권을 절제하면서 공감대를 확장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좌파는 투쟁실적을 발판으로 우파의 친일을 공격했다. 우파는 재산의 기득권에 눌러앉아 좌파를 빨갱이라고 공격했다. 양쪽 모두 통합의 구심력이 아니라 대결의 원심력만 진저리치듯 쏟아냈다.

여운형을 누가 죽였는지는 명확하다. 우리가 죽였다. 일본도 미국도 소련도 아닌, 바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죽였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가 아니라, 서로 살아서 밀고 당기기를 해야 했다. 그러지 않은 결과는 적대적 공멸이었다. 한국전쟁이 준 가장 크고 아픈 교훈이다. 여운형의 묘소 정문에 장식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다시 쳐다본다. 여운형의 죽음은 피가 물보다 진하지 않았다는 당시의 역사를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그래도 나는, 멈칫멈칫하면서도 그의 말에 공감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최소한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공멸에 빠지지 않을 만큼은 진해야 한다.

[필자 알림] 
2020년 이후 계속해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답사여행 – 휴전선(강화·교동~강원·고성)>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휴전선 답사여행 9차(10.20~25)에 동반하고자 하는 독자는 다음 링크의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뒤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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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 수묵화(작가 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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