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올드 레이버’와 낡은 민주당

신창호 2023. 6. 8.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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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올드 레이버(Old Labour)'란 고유명사가 올라와 있다.

뉴 레이버는 2년 뒤 영국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20년 만에 노동당 정권을 탄생시켰다.

런던은 미국 뉴욕과 더불어 '세계의 금융 수도'가 됐고, 치과 치료 한 번 받는 데 10년이 걸렸던 영국 건강보험 시스템은 새로운 효율을 수혈받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야당 더불어민주당도 20세기 말 영국 노동당이 처했던 위기와 혁신의 기로에 놓여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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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올드 레이버(Old Labour)’란 고유명사가 올라와 있다. 정반대의 뜻인 ‘뉴 레이버(New Labour)’도 등장한다. 전자는 영국 노동당 구파를, 후자는 노동당 신파를 뜻한다.

1996년 런던의 변호사 두 사람은 노동당 전당대회 무대에 등장해 뉴 레이버 선언을 했다. 재정적자도 감수해야 할 정도의 엄청난 공공 지출, 기간산업 국유화, 노동조합 우선주의, 성장보다는 복지 등의 정책을 100년 가까이 고수했던 노동당 주류를 ‘낡은’ 노동당원들이라 몰아붙였다. 그리고 자신들은 균형 재정, 경쟁력 잃은 국유기업들의 민간 매각, 노조원이 아닌 영국 서민 우선주의, 성장과 복지의 균형을 내세운 ‘새롭고 활력에 찬 노동당원’이라 규정했다.

전당대회는 누가 봐도 뉴 레이버의 패배가 명확해 보였지만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났다. 당직을 독점하고 당 조직을 장악했던 올드 레이버가 일반시민 투표에서 20대 80의 비율로 참패한 것이다. 노동당은 뉴 레이버의 손에 넘어갔다. 뉴 레이버는 2년 뒤 영국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20년 만에 노동당 정권을 탄생시켰다. 런던의 두 변호사,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은 번갈아 가며 영국 총리직에 올랐다. 96년 노동당 전당대회의 하이라이트는 100년 역사의 노동당기 색깔을 바꾼 일이었다. 레드 크림슨(붉은 혈액) 색깔이 페이디드 로즈(faded rose·옅어진 붉은 장미)가 된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으로’, 공공 의료보험, 무상교육 등을 선도했던 정당이 바로 영국 노동당이다. 하지만 이 정책 때문에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영국은 저성장, 저효율 경제의 엄청난 재정 적자에 노동 귀족으로 가득찬 노조의 횡포로 몸살을 앓았다. 오죽하면 “비틀스와 록 음악 빼고 나머진 다 수입해야 하는 나라”라는 비아냥을 들었겠는가.

토니 블레어 정권은 노동당의 모든 ‘선한 실패’를 일소했다.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당과 정치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만들었는지, 영국의 현실을 보라”고 외쳤던 전당대회 연설은 아직도 정치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이다. 98년을 시작으로 영국 노동당은 2015년까지 집권했다. 망가졌던 영국 경제는 이 사이 체질을 완전히 개선했다. 런던은 미국 뉴욕과 더불어 ‘세계의 금융 수도’가 됐고, 치과 치료 한 번 받는 데 10년이 걸렸던 영국 건강보험 시스템은 새로운 효율을 수혈받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야당 더불어민주당도 20세기 말 영국 노동당이 처했던 위기와 혁신의 기로에 놓여 있는 듯하다. 군사독재 시절부터 차곡차곡 축적돼 왔던 전통적 지지층인 민주화 세력과 노조에만 기댈 것이냐 하는 문제 말이다. 민주당 내에는 “이때까지 우리는 항상 이 두 지지층과 호흡해왔고, 그럴 때만 성공했다”는 확신이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시민들의 주류는 이 두 세력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인다. 20대 Z세대와 30대 밀레니얼 세대는 군사독재의 기억이 없다. 40·50세대와 노년층도 지나간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나 들춰보려 하지는 않는다. 선진국이 된 한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원하고, 보편 복지가 일반화된 우리 사회의 효율적 운영을 원하며, 상식에 부합하는 세계관과 청렴한 정치윤리를 기대한다.

민주당에서 새로운 정책이 나온 때가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벤처기업 성장정책, 문화산업 수출정책은 2000년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됐는데, 지금 민주당이 가진 정책이 뭔지 들어본 적이 없다. 언제인가부터 민주당은 ‘낡은 민주당’이 된 게 아닐까.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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