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교의 가장자리] 수락산, 천상병의 영원한 쉼터

입력 2023. 6. 8. 00:55 수정 2023. 6. 8. 20:3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두통이 심했던 니체는 산소가 충만한 스위스 질스마리아의 숲과 호수를 좋아했다. 노원구는 집에서 10여 분이면 수락산 산림공원에 닿을 수 있는 축복 받은 변두리다. 머리 아플 때 산소 충만한 해찬솔 산길을 거닐면 뭔가 뻥 뚫린다. 이 동네에는 시인과 작가들이 많이 사는데, 조선시대엔 매월당 김시습, 가까이에는 시인 천상병(1930~1993)이 살았다. 창피하게도 나는, 문우들에게 삥이나 뜯는 걸인으로 그를 잘못 알고 있었다. 『천상병 전집』을 통독하고 나서 내 꼬락서니가 남세스러웠다.

「 악동·기벽 시인으로 오해받아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투옥살이
수락산에서 만난 ‘자연=절대자’
평화와 진실 노래한 천상 시인

수락산 노원골 입구의 천상병공원에 세워진 천상병 시인의 동상. 아이들과 강아지와 평화롭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천진한 시인의 얼굴이다. [사진 노원구청]

한국전쟁 중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갈대’)는 그의 실존은 변두리 난민 자체였다. 1967년 간첩조작사건이었던 동백림사건 때 6개월의 투옥은 그의 삶을 망가뜨렸다. 유학 중 동독을 방문하여 간첩 혐의를 받던 대학 동문에게 얻은 막걸리값 5만원이 공작금으로 둔갑하여 지옥을 겪은 그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충격으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된다. 1972년 결혼하고 상계동에서 살면서 수락산이 그를 살린다. 대표작 ‘귀천-주일’(1970)을 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중략)//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각연 1행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가 반복된다. 본래 ‘주일(主日)’이라는 부제가 있는데 교과서나 시비 등에는 없다. 천주교 신자로 말년에는 연동교회에 다녔던 그는 이 시를 주일인 일요일에 썼을 수도 있다. 아마 매일 매일을 숭고한 주일로 생각했을 수 있겠다. ‘새벽빛’에서 ‘노을빛’을 거쳐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로 이어진다. 매일 소풍 가는 등산객을 보았을 그의 시에는 ‘자연=인간=절대자’가 하나로 유토피아를 형성한다.

‘나는 수락산 아래서 사는데/ 여름이 되면/ 새벽 5시에 깨어서/ 산 계곡으로 올라가/ 날마다 목욕을 한다’(‘계곡흐름’)는데, 지금도 가랑비만 내려도 어른 몸 누일만한 계곡이 있다. 술 취한 고주망태가 아니라, 그는 ‘KBS라디오의 희망음악은/ 아침 9시 5분 10시까지인데/ 나는 매일같이 기어코 듣는다’(‘희망음악’)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말년에 쓴 ‘최저재산제를 권합니다’는 중요한 작품이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부자는 부자대로 많은 재산을/ 대학이나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 끊임없이 기부하면서/ 사회환원을 기어코 한다는데/ 우리나라서는 그러지 못해요!// 그래서 필자가 말씀드리는 것이/ 이 최저재산제입니다요!// 한 10억원 정도로/ 사유재산고를 제한하는 것이/ 앞으로 유익한 자유주의체제가 될 것이며.’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서울 변두리의 불량주택을 없애는 계획을 세운다. 1986년 6월 26일 상계동에 전경과 백골단, 용역 깡패가 한꺼번에 덮쳐 닥치는 대로 폭행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아비규환의 현장에 와서 폭력철거를 멈추기를 호소했지만, 폭력은 그치지 않았다.

폭력과 욕망의 현장을 목도한 시인의 절실한 호소이기에, 이 시에는 감탄부호(!)가 많다. 그의 제안대로 최저재산금으로 10억, 아니 100억으로 최저재산을 제한하여 그 이상 넘는 재산을 공공재로 내놓는다면 얼마나 놀라울까. 부자들은 다들 해외로 도피할까.

이후 노원의 마들에는 아파트가 무섭게 세워졌다. 이 지역엔 그때 상처받은 분들이 아직 살고 있다. 최저재산제를 주장했던 천상병의 성찰을 기억해야 한다.

시인 신동엽이 작고하자 ‘현실의 그 가장 심층부 속을 은밀하게 흐르는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도전하는 태도, 이것이 그였다’(‘신동엽’)라며 천상병은 안타까워했다.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을 인식한 윤동주처럼, 천상병은 자신의 천명을 ‘낡은 목청을 뽑아라/ 그렇게 우는 한마리 새’(‘새’)로 삼았다. 진실을 향해 그는 던적스러운 시류를 외면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인생의 진실은 여기저기에 깔려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시이다. 시를 읽고 짜증을 낸다면 그 시는 가짜이다. 나는 이런 시는 쓰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인생의 참뜻을 알리려고 했다.’(‘나의 시작의 의미’)

귀찮은 악동으로 오해된 그의 텍스트를 다시 읽자. 그가 살았던 장모님 집터나 ‘여기 변두리, 나 사는 동네/ 단골 술집이 있는데/ 아직도 간판이 없는’(‘구름집’) 주막에 지금이라도 현판을 달자. 1993년 4월 28일 하늘로 소풍 간 그를 따라 천상병 문학기행을 안내하다 보면, ‘문디이자슥아, 잘 왔다’며 늘솔길에서 그가 또바기 반긴다. 꾸밈 없이 진실을 노래한 파레시아스트, 그가 저 산에 아스라이 가득하다.

김응교 시인, 숙명여대 교수

Copyright©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