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훈의 음식과 약] 어디에서 봤을까

입력 2023. 6. 8. 00:39 수정 2023. 6. 8.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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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무엇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출처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보거나 들은 정보를 기억하는 쪽으로는 잘 발달해있지만 그런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를 기억하는 면에서는 매우 취약하다. 출처기억은 늦게 발달하고 노화에 취약하다. 인간 고유의 정신기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피질에서 이런 기능을 담당하는데 뇌에서도 이 부위는 성숙이 느린 편이다.

전전두엽 피질이 손상된 환자는 출처기억력이 저조해져서 자주 곤란을 겪는다. 1997년 한 실험에서 참가자 절반에게는 남성이 문장을 읽어주도록 하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여성이 동일한 문장을 읽어주도록 실험하면 이들 환자는 문장의 내용은 잘 기억하지만 읽어준 사람의 성별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드러났으니, 건강한 사람도 출처를 기억하기 어려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만 누가 그 얘기를 해줬는지는 기억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인간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다. 특히 어디서 보고 들었는지에 취약하다. 메모가 중요한 이유다. [중앙포토]

나도 출처기억력 때문에 애먹을 때가 많다. 지난주 드라마를 보다가 마음에 들었던 대사가 몇 화에 나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려 여섯 편을 다시 보고 나서야 마침내 그 대사가 나오는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인상적 장면을 보자마자 캡처하거나 메모해뒀더라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책을 읽든 영화나 드라마를 보든 간에 기억하고 싶은 내용이 나오면 그때그때 기록을 남겨둬야 출처를 찾지 못해 헤매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출처기억력을 향상하는 약은 아직 없다. 메모만이 답이다.

저조한 출처기억력의 문제는 더 심각한 결과로도 이어진다.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팩트와 다르게 그려진 장면을 보게 될 때 그렇다. 우리의 뇌는 출처 없이 정보의 내용만을 기억하므로 사실을 왜곡한 극 중 이야기를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될 수 있다. 40년 전 스파이영화에 나온 장면 때문에 전전두엽이 손상된 환자 한 명이 자신의 집 근처 건물이 사악한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믿었다는 사례가 보고된 적이 있다. 영화 속 장면이라는 정보의 출처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런 망상에 빠진 것이다. 건강한 사람도 이런 왜곡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실험에서 팩트와 다른 내용이 있다는 사전 설명을 하고 영화를 보도록 해도 대학생들은 팩트보다 영화 속 허구를 더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출처보다 내용을 기억하는 게 생존에 더 중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굴 근처에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그 얘기를 누가 해줬는가보다 의미 있었단 얘기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출처기억과 팩트 체크가 필수적이다. 내가 아는 게 사실이 맞는지 항상 확인해보자.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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