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량, 오래된 장소가 품은 기억
이경진 2023. 6. 8. 00:34
지금, 여기. 부산의 '오초량'이 대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가치에 대하여.
부산 초량(草粱)의 ‘초’는 억새나 갈대를 뜻한다. 원래 이곳은 바다 앞에 나지막한 언덕이 있던 자리였다. 언덕이 억새와 갈대로 뒤덮여 있어 초량이란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언덕과 언덕 사이로 하천이 흘러 바다까지 이어졌다. 도시개발로 이곳이 매립되기 전을 상상해 보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바람이 흐르는 대로 은빛 억새들이 휘날리는 장관이 펼쳐진다. 이런 곳에 집을 짓고 매일 넘실대는 바다와 억새풀을 바라보며 산다는 건 도시에서는 꿀 수 없는 꿈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다와 억새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지만,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장소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초량’은 독특한 역사와 지형을 지닌 초량의 100년 기억을 품은 공간이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적산가옥으로, 1925년 토목업에 종사했던 일본인 다나카가 지었다. ‘적산’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적개심을 품고 있는 이곳은 도시가 개발되면서 적개심의 대상이 바뀌었다. 아파트를 한 채 더 짓고도 남을 공간에 2층 목조주택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누군가는 이곳을 차지한 이가 여간 미운게 아닐 것이다. 삭막한 고층 아파트 사이에 홀로 놓여 있는 모습에선 더더욱. 서울에서는 보안여관을, 부산에서는 오초량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것이 ‘일이 된’ 최성우 대표는 ‘오래된 장소가 품은 기억을 경험하는 것’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다. 그는 “20년은 일본인이 살고, 해방 이후 80년은 한국인이 살면서 이 작은 목조주택에 한국인의 손길이 세심하게 배어 있다”며 “주택에 담긴 역사적 · 문화적 혼종성은 부산의 정체성 중 하나”라고 말한다. 보안여관이 불특정 다수가 머물던 공간이라면, 오초량은 개인 주거지였다. 훨씬 더 내밀하고 정제된 시간의 경험이 쌓여 있다.
2007년 등록문화재 제349호로 지정돼 간헐적으로 일반에 공개됐던 오초량이 5월 10일을 기점으로 전면 개방됐다. 우리나라 근대 주택사와 생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모두 그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에 의의를 두지만, 오초량의 쓰임에 대한 최성우의 생각은 좀 더 낭만적이다. 과거의 시간을 품고 있는 고요한 주택에 앉아 창밖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는 것. 아왜나무와 동백, 금목서 등 남부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와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피어 있는 정원은 누군가 각별히 가꾼 흔적이 역력하다.
도시의 시간보다 느리게 흐르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차 한잔 곁들이는 단순한 경험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초량 앞에 ‘오!’란 감탄사를 붙인 연유다. 이곳을 운영하는 일맥문화재단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에 맞는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재개관을 기념하는 첫 전시의 이름은 〈오! 분더카머〉. 독일어로 ‘호기심의 방’ ‘경이로운 방’이란 뜻의 분더카머는 16~17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진귀한 물건을 수집하고 진열한 저택의 공간을 지칭한다. 100년 된 주택에 동시대 공예 작가들의 작품과 20세기에 만들어진 유럽의 아트 퍼니처가 놓여 있는 전시는 오초량을 방문하고 싶은 또 다른 이유가 될 테다. 전시는 7월 9일까지, 하루 두 차례 관람이 진행된다. 미리 예약하고 방문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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