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보다 유튜버, 펀드보다 리딩방...불신의 늪, 韓자본시장

명순영 매경이코노미 기자(msy@mk.co.kr) 2023. 6. 7.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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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더라’에 귀 쫑긋…애널 분석 뒷전

VIP자산운용은 3조원 넘는 돈을 굴리는 헤지펀드 명가다. 올해 처음으로 일반 투자자 대상 공모펀드에 도전했다. 특히 ‘수익이 나지 않으면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화제를 모았다. 2월 출시한 첫 공모펀드 ‘VIP The First’는 첫날 300억원이 몰려 ‘완판’됐다. 4월 두 번째 공모펀드 ‘VIP한국형가치투자’에는 출시 한 달 만에 500억원 넘는 돈이 몰렸다. 최근 2년간 신규 설정된 국내 주식형 액티브 펀드 29개 가운데 설정액이 500억원을 넘어선 것은 VIP한국형가치투자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SG증권발 주가 폭락을 일으킨 라덕연 사태를 생각하면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미신고 유사 투자 자문 업체를 운영한 라덕연 세력에는 ‘조 단위’의 돈이 몰렸기 때문이다. 수십 퍼센트의 높은 수익을 약속하며 작전을 벌였다지만, 비(非)제도권 세력에게 정통 금융사가 ‘의문의 1패’를 당한 셈이 됐다.

라덕연 사태는 개인 투자자의 제도권 불신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업 분석에 밝고, 리스크 관리에 철저한 운용사 펀드가 외면당하는 현실이다. 개인 투자자는 ‘팩트 체크’에 충실한 증권사 리서치 애널리스트 보고서보다 텔레그램 유료방에서 떠도는 확인 안 된 정보에 귀를 쫑긋 세운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폄훼하는 유튜버가 인기를 끌고, 반대로 유명 투자 유튜버에게 반기를 들면 개인 투자자가 득달같이 달려와 악플 공세에 나선다. 애널리스트의 부정적인 보고서가 등장하면 개인 투자자는 “이때가 매수 타이밍”이라며 주식을 사들인다. 제도권과 반대로 움직이는 투자자가 ‘찐’인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라덕연 일당은 조 단위 돈 모았는데

1조 넘는 공모펀드 단 한 개뿐

제도권 불신은 숫자로 나타난다. 펀드매니저가 적극적으로 종목을 발굴하는 ‘액티브 주식형’ 펀드 가운데 1조원대는 ‘신영밸류고배당증권투자신탁운용’이 유일하다(5월 31일 기준). 2007년 4월 설정된 이 펀드는 배당주 중심의 장기 투자 펀드로 16년 넘게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위부터는 덩치가 확 쪼그라든다. 2~3위 펀드는 ‘하나UBS인Best연금증권투자신탁’과 ‘신영마라톤증권투자신탁’으로 4000억원대 수준이다. 국내 액티브 주식형 펀드 중 1000억원대가 넘는 규모 펀드는 37개에 불과하다. 공모펀드 불신이 이어지며 올해 16년 만에 처음으로 수탁고 1000조원 선이 무너졌다. 주식형만 따지면 78조원대로 2008년(130조원) 대비 절반 가까이 줄었다.

전문가들은 제도권 금융사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개인 투자자가 공모펀드를 외면하고, 증권사 리서치센터 정보를 믿지 않는 분위기를 자초했다는 설명이다. 라임이나 옵티머스 사태 등 금융 시장을 뒤흔든 사고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게 그 사례다. 유력 증권사가 판매하고 멀쩡한 운용사가 굴리는 펀드에 돈을 넣어도 큰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인식은 전체 제도권 투자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스타 매니저 일탈이이나 주가에 거품이 끼었다고 판단해도 매도 보고서를 내지 못하는 리서치 분위기 역시 제도권 불신을 불렀다.

이 밖에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증권사 임직원 모럴 해저드, 시장 논리가 아닌 정치 논리로 형성되는 ‘관제펀드’ 양산 등이 개인 투자자가 제도권을 외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2호 (2023.06.07~2023.06.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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