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시민단체 신뢰 회복, 출발점은 떳떳함이다

고승욱 2023. 6. 7. 04:2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등록 NPO 150만개인 미국도
횡령·사기 사건 끊이지 않아

정부 지원금 탈취 등 불법행위
엄정하게 단죄하는 것은 당연

정치권의 투명성 강요는 곤란
스스로 믿음 되찾게 지켜봐야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지난해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비영리단체(NPO) ‘피딩 아우어 퓨쳐(Feeding our Future)’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 단체는 농무부(USDA)의 자금을 지원받아 코로나19 때문에 급식을 못 받는 어린이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8개월 뒤 창립자 에이미 복을 비롯해 47명이 기소되면서 드러난 혐의 내용은 기가 막혔다. 3년여 동안 가로챈 연방정부 지원금이 2억5000만 달러였다. 주민이 1500명인 마을에서 어린이 1700명에게 매일 식사를 제공했다는 보고서를 내고 160만 달러를 받아 슈퍼카를 산 경우도 있었다.

팬데믹 행정 공백을 틈탄 사상 최대 연방 지원금 탈취 사건이어서 크게 주목받았지만 미국에서 NPO의 사기·횡령 사건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NPO는 우리로 치면 시민단체다. 자선, 교육, 문화 등을 위해 기부금으로 운영하는데,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 소득세가 면제된다. 연방법전 26권 501조 ⓒ항이 법적 근거여서 ‘501ⓒ 단체’라고도 부른다. 세금에 극도로 민감한 미국에서 소득세 면제는 큰 혜택이다. 정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자발적 노력으로 메우는 공로가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높은 도덕성은 기본이다. 시민들은 그렇게 믿고 존중한다. 하지만 세상에 구성원 모두가 선한 사회는 없다. 150여만개의 등록 NPO가 활동하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FBI는 자연재해나 테러가 발생하면 피해자 돕기 모금 운동을 조심하라는 경고문을 홈페이지에 올린다. 지난해에만 이 경고가 4번 나갔다. 어디에 어떻게 신고하는지도 자세히 안내한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참전용사를 돕겠다며 기부금과 정부 지원금 수억 달러를 가로챈 NPO 10여곳이 적발된 ‘참을 수 없는 사기(An intolerable fraud)’ 사건의 여파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에 근거해 등록된 1만5400여개 NPO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졌다. 행정안전부 지시에 따라 각 자치단체는 NPO 등록 신청 때 제출한 회칙, 총회 회의록, 회원명부, 활동실적 증명 등의 사실 여부를 다시 확인했다. 정부 지원금이 제대로 쓰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5일 발표한 비영리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도 그런 맥락이다. 시민단체 이름을 걸고 세금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멋대로 쓰는 것은 범죄다. 당연히 바로 잡아야 한다. 미국에서도 등록 NPO가 되려면 매년 국세청(IRS)에 수입·지출 및 활동의 상세 내역을 보고한다. IRS가 요구하면 회원과 기부자 정보도 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일이어도 남의 돈을 쓰려면 그 정도는 지키는 게 상식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특정 시민단체를 후원하게 된 납세자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민간단체 보조금 감사 결과를 놓고 ‘비판적 시민단체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정치적 압박’이라는 비판에 공감하는 목소리가 아직까지 커지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지금 우리나라 시민단체는 극도로 위축돼 있다. 정의기억연대 사건 이후 시민단체에 후원금을 내겠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과거 국회와 정부의 잘못을 추궁하며 존경받던 시민단체들이 언제부턴가 정치권 주변을 맴도는 세력 정도로 취급받는다. 시민운동을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으니 자업자득인데, 그렇게 잘라 말하기에는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를 위해 박봉 속에 성실하게 일하는 활동가가 너무 많다. 그래서 “요직 번호표 끊기자 다시 심판인 척한다”는 말에 뼈가 아프다. 해법은? 인내를 갖고 지켜봐야 한다. 정부가 투명성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키로 했으니 일단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정쟁에 이용할 속셈이 아니라면 정치권이 나설 이유가 없다.

미국에는 NPO를 감시하는 NPO 수백개가 전국적으로 활동 중이다. 그중 채러티왓치(CharityWatch)는 모금액의 20% 이상을 인건비 등 조직 운영에 사용하면 경고 사인을 보낸다. 가이드스타(GuideStar)는 시민에게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으면 ‘투명성 봉인’이라며 아예 평가 대상에서 제외한다. 이들은 IRS에 제출된 정보를 평가에 자유롭게 활용하며 객관성을 유지한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시민의 신뢰를 되찾은 시민단체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 신뢰의 출발점은 과거와 같은 이념이 아니라 활동과 회계의 투명성에서 비롯되는 떳떳함이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