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콩밭으로 몰려간 공직자들

서승욱 2023. 6. 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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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논설위원

▶김남국='점성이 높은 유산균을 경구용 의약품으로 봉입하기 위해 이중 유화액적에 최적화하는 실험 과정을 분석하고 결과를 담고 있는…' 이 논문을 1저자로 썼습니다, 이모하고 같이. 공저자가 아니라 1저자로.
▶한동훈=누구와 같이 썼다고요?
▶김남국=이모하고요, 이모.
▶한동훈=제 딸이요?
▶김남국=그렇습니다. 실험을 한 적이 있는지….
▶한동훈=잠깐만요, 이모하고…. 누구의 이모 말씀이신가요. 제가 사실 이걸 잘 챙겨보는 아빠가 아니라서 잘 모르기는 하겠는데요. 이모랑 뭘 같이했다는 얘기는, 논문을 같이 썼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5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질의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향후 자자손손 대한민국 국회 청문회 역사상 가장 황당한 사건 중 하나로 남을 장면에선 이런 대화가 오갔다. 지난해 5월 9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거짓말처럼 강렬한 한 방이 터져 나왔다. 질의 막바지에 김남국 의원(당시 민주당, 현재 무소속)은 "아까 이모가 썼다는 논문은 같이 공저를 한 게 아니라고 확인이 됐다"고 발을 빼려 했다. 하지만 "관련 기사를 보면 이모(姨母)가 아니라 이 모(李 某) 교수라고 나와 있다"는 국민의힘 의원의 팩트 폭격으로 김 의원은 한순간에 국민적 조롱의 아이콘이 됐다. 황당 질문이 나온 바로 그 청문회 이틀간 김 의원이 코인 거래를 30차례 넘게 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국민은 그제야 무릎을 탁 치게 됐다. "이모 논란이 이제 이해가 된다. 수십억원이 왔다 갔다 하는데 청문회가 뭐가 중요하겠냐"는 천하람 국민의힘 순천갑 당협위원장의 말대로다. 마음이 '코인 콩밭'에 가 있는데 '이모'든 '이 모'든 뭐가 대수였을까.

「 김남국 코인과 선관위 자녀 취업
공직자 신분 망각이 부른 참사들
용산 직원들 생각도 '총선 콩밭'에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관리 업무 와중에 자녀의 취업 문제를 알뜰히 챙긴 중앙선관위 간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겐 지방 공무원으로 일하는 자녀를 '헌법상 독립기구'인 선관위 소속 중앙 공무원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미션이었을 것이다. 절박한 미션 수행에 마음이 콩밭인데, 대선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담든 라면박스에 담든 무슨 상관이었겠나. 지난해 대선이 폭동 없이 치러진 게 오히려 기적처럼 느껴진다.

어디 이 사람들뿐이랴. 김 의원과 선관위에 호통을 치고 있는 정부와 대통령실에도 비슷한 부류의 이들이 적지 않다. 당장 국회 운영위에선 용산 대통령실 관계자의 지극한 고향 사랑이 도마에 올랐다. 충청도 고향에서 열린 파크골프 대회에서 시타를 했고, 각종 동문회와 체육대회 행사에 얼굴을 내밀며 부지런하게 명함을 돌렸다. 개인 비용으로 봉황이 새겨진 축기를 지역 행사에 보내기도 했다. 본인은 "직능이나 지역, 많은 시민단체와 소통하는 게 나의 업무"라고 했지만 국민의힘의 동료들까지 "마음만 콩밭이 아니라 몸까지 총선 콩밭에 가 있다"고 비아냥댄다. 다만 이런 비판을 혼자서만 뒤집어쓰기는 너무 억울할 것도 같다. 대통령실 핵심 인사와 정부 고위직 중엔 "어느 지역 출마가 유력하다더라" "특정 지역 출마가 어려워 차라리 다른 기관장 자리를 원한다더라"는 소문이 꼬리를 무는 분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는 생각에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

코인으로 한탕 크게 잡으려면, 선거 관리보다 자녀의 취업 미션에 올인하려면, 향후 4년간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국회의원 배지가 탐난다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고 매진하시길 바란다. 세금으로 봉급을 받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실 공직자가 아닌 사인(私人) 자격으로 눈치 보지 말고, 그냥 그 일에 쭉 집중하시면 된다.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장외집회에서 야당 최고위원이 윤석열 대통령을 '이런 작자'라고 부르며 논란을 낳았다. '이런 작자'란 표현은 육신이나 영혼이 콩밭에 가 있는 이런 분들에게 쓰는 게 더 적절할 듯싶다. 자기 가슴에 붙어 있는 명찰의 무게를 망각한 이런 작자들 말이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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