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뱀 내려온다, 뱀이 내려온다
한 달 전 전화통화를 하며 집 근처 약속 장소로 걷는데, 씩씩하게 내딛던 두 발 가운데 한 발이 순간 허공에 들린 채 어떤 간을 보는 감을 행하는 것이었다. 마른 갈색 잎이 쌓인 틈에서 무언가의 아주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스물스물이 아니라 스멀스멀이야. 와중에 정확한 표기법을 떠올리는 걸 보니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나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맞다. 뱀이었다.
“헐, 한나야 나 지금 뱀 밟을 뻔했다.” “언니 뱀이요? 진짜 뱀이요? 얼른 도망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 전화 끊지 말고 딱 기다려.”
나는 가방에서 업무용 휴대폰을 꺼내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을 만큼만 게걸음으로 물러난 뒤 뱀을 찍기 시작했다. “한나야, 근데 뱀이 아가인가 봐. 쥐똥 같은 눈에 겁이 꽉 찼어. 근데 얘는 어쩜 얼굴이 이렇게 작냐.” 스피커폰으로 소리를 키운 통화 중의 휴대폰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 나와 한나와 갈색 뱀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아니면서 끼리끼리 우리끼리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언니 안 무서워요?” “야, 쟤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얼마나 ‘걸리버’겠냐? 근데 대명천지에 쟤는 왜 인도까지 내려왔을까?” “박연준 시인이 그러셨다면서요. 파주는 나무들이 짐승처럼 자란다고요.”
내가 아니라 내가 본 뱀이 궁금하다는 지인이 있어 나는 요놈 봐라 하고 “겁이 없는 내가 겁이 많은 뱀을 사랑해서 오늘밤은 솔솔 바람이 분다”라는 백석의 시를 패러디한 구절과 함께 뱀 영상을 보냈다. 그런데 그의 시 한 구절이 새삼 또 좋고 말고 하는 것이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 했지. 요즘 들어 뱀 출몰 소식이 잦은 가운데 우리 사는 집터에 녹지가 늘어난 것도 한 이유, 야외로 음식물 쓰레기 배출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보니 쥐와 같은 설치류가 설치게 된 것도 한 이유라는데 아무렴, 끼니때 내 밥상 싹싹 비우면 뱀이든 나든 서로 보고 놀랄 일은 줄지 않겠냐는 얘기!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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