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미술관]⑤삼성이 사랑한 이우환…철학하는 예술가
대상을 이념적 이해 없이 직접 마주하도록
메를로 퐁티 '세계-안에로의-존재' 영향
"그림이 의미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의미가 그림을 잉태하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지난 5월27일 비가 내려 한산했던 국제갤러리에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이 방문했습니다. 이우환·알렉산더 칼더 개인전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홍 전 관장은 알렉산더 칼더보다 이우환 전시에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홍 전 관장의 발길을 사로잡은 이우환 작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우환 전시를 본 사람들은 어렵다고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작품을 보면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그는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했으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니혼대학 철학과에 들어갑니다. 이후 '모노하(もの派)'라 불리는 1960년대 일본의 예술 운동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비평하며 유명해집니다.
돌·철·유리판 등을 특정한 공간에 두는 설치 작품
'관계항' 시리즈는 돌·철·유리판 등을 특정한 공간에 놓아두는 설치 작품입니다. 이우환의 대표작이기도 합니다. 미술계와 철학계는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와 하이데거를 인용해 그의 작품을 해석합니다.
첫 번째 사진을 보면 큰 곡선형 철판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그 옆에 돌이 자리합니다. 일반적으로 돌은 자연을, 철은 문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말하지 않습니다. '관계항(Relatum)'이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관계항은 철학 용어로, 관계를 맺는 '주체'를 의미합니다. 작가는 왜 '관계'가 아닌 '관계항'이라는 제목을 달았을까요? '관계'란 사적으로 사람·사물·현상 등이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대상을 볼 때 주관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가령 꽃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관계' 측면에서 보면 여자친구를 만나는 사람일수도, 꽃을 파는 상인일수도, 생일을 맞은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나름의 해석을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관계항'은 우리 앞에 놓인 대상을 규정하지 않고 대상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꽃과 남자에 관한 사회적, 이념적 맥락을 벗어나 각 주체의 본질에 집중하는 겁니다.
지각의 장에서 사물들이 서로 관계 맺는 구조 사유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볼 때 현재 세계관 안에서 인식합니다. 가령 산에서 나무를 본다면 '자연은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자연(나무)은 훼손되면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선입견이지요.
철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보면 자연을 극복한 문명을 생각합니다. 이우환은 이념적으로 대상을 이해하지 말고 사물 그 자체에 집중하라고 합니다. 메를로 퐁티 표현으로 이를 '원초적 세계'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작품을 보면 무엇이 보이나요? 돌이 보이되 그저 돌이 아닙니다. 어쩌면 큰 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람·태양·비 등 자연을 품은 돌은 시간 그 자체를 담은 몸이 되었습니다. 철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었지만 자연에서 생겨난 금속입니다. 철판 이전에 철광석으로, 철광석 이전에 암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공간 속 관계 사이를 부유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손지민 단국대 철학과 교수가 그의 논문에서 "이우환 등 모노하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이념을 배제하고 세계 내에 존재하는 사물(오브제와 구분)들이 처한 상황을 관객이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고 평가한 것은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여백, 작가의 개입 줄이고 관람객 참여 유도
이우환 작품의 또 다른 특징으로 '여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회화 작품에서 이런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캔버스의 여백이 눈에 띄는데, 비어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관계항' 작품이 전시된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작품에는 화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화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작품에 투영되지요. 관람객은 작가의 세계관을 보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우환의 작품은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합니다. 이를 미술계는 '완결성을 부정한다'고 표현합니다.
그 때문에 관람객은 여백을 통해 대상과 적극적으로 교감할 수 있습니다. '관계항'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람객은 이들을 바라보며 조응(照應)합니다. 나아가 작품을 보는 관람객 역시 작품의 연장선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우환은 마치 고독한 철학자와 같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탐구하듯이 작품을 통해 세상의 구조를 사유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철학의 나라 프랑스에서 유독 인기가 많습니다. 그는 2007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2014년에는 파리 인근의 베르사유궁 초청으로 야외정원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습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도시 '아를'에 가면 '이우환 미술관'이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개관한 상설 작품 전시관입니다.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했던 도시이자,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뜨는 곳입니다. 지난해 4월 이곳에 '이우환 미술관'이 문을 연 것은 의미가 큽니다. 아직 여름 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면 철학의 나라 프랑스를 방문해 이우환 작품을 관람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
사르트르 vs 메를로 퐁티, 강미라, 세창출판사
아트앤스터디, '철학이 만난 예술 Ⅰ: 메를로-퐁티, 하이데거, 리오타르, 블랑쇼'(김동국)
아트앤스터디, 현상학에서 실존주의까지 Ⅱ :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카뮈(장의준)
황윤주 기자 h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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