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터널 있다" 러와 은밀한 20년…美FBI 최악 스파이 옥중사망

이유정 2023. 6. 6. 15: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FBI 아카데미' 진열장 안에 보관된 로버트 핸슨의 신분증과 명함. AFP=연합뉴스

미국 연방수사국(FBI) 역사상 최악의 간첩 스캔들의 장본인인 로버트 핸슨(79)이 5일(현지시간)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미 뉴욕타임스(NYT) 등이 보도했다. 핸슨은 FBI 특수요원 신분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20년 넘게 옛 소련과 러시아의 스파이로 활동한 인물이다.

연방 교정 당국은 이날 성명을 통해 “핸슨이 오전 6시 55분쯤 콜로라도의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의식 없는 상태로 발견돼 응급조치를 했으나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는 2002년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미국에서 경비가 삼엄하기로 손꼽히는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해왔다.

미 FBI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핸슨 사건을 “미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간첩 사건”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가 체포됐던 2001년 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20년 넘게 FBI의 방첩 부서 등에서 활동해 온 베테랑 특수요원이 다름 아닌 러시아의 스파이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소 간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76년 FBI에 특수요원으로 들어온 핸슨은 79년부터 소련에 미 정부의 민감 정보를 건넸다. 이 중에는 미국 측 정보원으로 활동해 온 소련의 비밀경찰(KGB) 요원 3명의 신원 정보도 포함돼 이 중 2명이 처형 되기에 이르렀다. 미 정보 당국이 소련을 도청하기 위해 워싱턴DC 소련 대사관 아래 터널을 판 사실을 알린 점 등 15가지 간첩·음모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소련의 핵 공격에 대비한 미국의 대응 계획 일부도 넘어간 것으로 FBI는 파악했다. 핸슨은 그 대가로 현금과 다이아몬드 등 140만 달러(약 18억원) 상당의 공작금을 챙겼다.

여섯 자녀를 둔 핸슨은 워싱턴DC의 교외에 사는 평범한 아빠이자 신실한 기독교인인 양 행세했다. 스스로 “보수주의적 반공주의자”라고 소개하며 주변을 감쪽같이 속였다. 핸슨의 존재는 KGB 요원들 사이에서도 코드명 ‘B’ 또는 ‘라몬 가르시아’라는 가명으로만 알려졌다. 1980년 부인의 간곡한 만류로 잠시 간첩 활동을 중단했다가, 85년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FBI와 미 중앙정보국(CIA)은 1990년대부터 러시아 측에 정보가 새고 있다는 걸 파악했고, 내부 첩자를 가리는 일명 ‘두더지 잡기’에 돌입했다. FBI는 2000년에야 한 전직 러시아 정보 장교에게 700만 달러를 건네고 ‘B’라는 인물이 러시아 관계자와 대화하는 녹취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음석 대조와 지문 감식 등을 거쳐 핸슨을 특정한 뒤, 당시 국무부에 파견 가 있던 핸슨을 FBI 본부로 불러 들였다. 핸슨엔겐 “승진 대상이라 기술 보좌직에 해당하는 특별 보직을 주겠다”고 했다.

2001년 2월 FBI가 공개한 로버트 핸슨의 모습. AFP=연합뉴스

FBI는 본부에서 근무하게 된 핸슨의 사무실에 특수요원을 근무하게 한 뒤 구체적인 간첩 행위를 수집하게 했고, 마침내 2001년 2월 워싱턴DC 근교의 공원에서 그를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핸슨은 러시아 측에 전달할 소포를 소지하고 있었다. 붙잡혔을 때 첫 마디는 “(나를 붙잡는데)왜 이렇게 오래 걸렸느냐(What took you so long?)”였다고 NYT는 전했다. 그를 둘러싼 영화 같은 첩보전은 2007년 ‘브리치’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핸슨의 간첩 행위는 미·러 간 외교 갈등으로 비화됐다. 조지 W.부시 미 대통령이 러시아의 간첩 활동을 문제 삼아 50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자국에서 추방했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모스크바 주재 미국 외교관 50명을 맞추방 하며 대립했다.

재판에 넘겨진 핸슨은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지 않는 대가로 모든 혐의를 인정했고, 2002년 5월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7월부터 테러범 수감시설인 플로렌스 교도소에서 옥살이 해왔다. 핸슨 사건은 FBI가 내부 직원들에 대한 보안 규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FBI는 기밀 접근권이 있는 직원들에 대해 출입국 기록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거짓말 탐지기도 쓸 수 있도록 규정을 고쳤다고 한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