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급 기본급의 1000%"는 옛말…확 늘어난 '수·양·마 복귀'

고석현, 김수민 2023. 6. 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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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후 경기도 판교 테크노벨리 단지 퇴근길이 한산하다. 전민규 기자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한 금융 플랫폼 스타트업에 다니던 개발자 김모(32)씨는 지난 4월 첫 직장이었던 예전에 다녔던 대기업에 재입사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말 헤드헌터의 제안으로 연봉 2000만원을 올려 스타트업으로 이직했지만, 2년여 만에 연봉을 일부 깎아 친정으로 컴백한 것이다. 김씨는 5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첫 취업 때보다 어렵게 지금 회사에 재입사했다”고 털어놨다.


연봉 감소 감수하면서 친정으로 ‘복귀’


최근 김씨처럼 정보기술(IT) 플랫폼 스타트업을 택했다가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오는 이른바 ‘연어 MZ 직장인’이 늘고 있다. 코로나19 엔데믹 후 IT 시장에 한파가 불어 닥치면서다.

무엇보다 IT 개발자 구직 시장이 얼어붙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엔 ‘개발자’ 타이틀만 들어가면 모시기 경쟁이 치열했지만 불과 2~3년 만에 옛말이 됐다. 이직 시장에서 ‘개발자 대규모 채용’ ‘이직 인센티브 지급’ ‘성과급 기본급의 1000%’ 같은 문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실제로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정보통신 업종에서 대·중소기업 간 이직률 격차는 2020년 1분기 1.2%포인트에서 올 1분기 1.8%포인트로 크게 뛰었다. 격차가 커질수록 중소→대기업 이직자 비중이 높다는 뜻이다. 3년 새 이직률 격차가 0.6%포인트 늘었다는 것은 이 기간에 중소→대기업으로 옮긴 직장인 비중이 50% 늘었다는 의미다. 익명을 요구한 헤드헌팅 업계 관계자는 “불과 2~3년 만에 스타트업 엑소더스(대탈출)가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24일 오후 경기도 판교에 있는 유스페이스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판교 테크노벨리 전경. 전민규 기자

스타트업 한파로 ‘연어 MZ 직장인’ 급증


스타트업을 떠나는 젊은 직장인 대부분은 안정적인 보수와 복지, 정년을 보장하는 이른바 ‘수·양·마’(각각 수원·양재·마곡에 주로 입주한 삼성‧현대차‧LG를 가리킴)로 돌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트업의 성공 대명사로 불렸던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에서 대기업 출신 인재를 빨아들였다가 불과 2~3년 만에 토해내는 셈이다.

대기업으로 유턴하는 젊은 직장인이 늘어나는 건 스타트업에 몰리던 돈줄이 말라붙으면서다. 스타트업 업계에선 요즘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프롭테크(부동산+기술) 기업인 직방은 최근 2~3개월 새 전체 임직원의 10%가량이 회사를 떠나 지금은 임직원 수가 400명대다. 2021년 초 ‘개발자 초봉 6000만원+이직 보너스 1억원’을 내걸고 인재 영입 경쟁에 불을 댕겼던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불과 4개월 만에 임직원 70% 줄인 곳도


스마트팜 구축을 통해 농업계에서 대표적인 ‘유니콘’(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기업)으로 꼽히던 그린랩스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했다. 국민연금 통계에 따르면 이 회사의 올해 1~4월 퇴사자 수가 300여 명에 달한다. 전체 임직원의 70%가량이다.

유명 핀테크(금융+기술)인 뱅크샐러드, 온라인 수업 플랫폼인 클래스101 등에서도 최근 전체 직원의 10%가량이 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온·오프라인 수업 플랫폼 탈잉, 공유오피스 패스트파이브, 온라인동영상 서비스(OTT) 왓챠, 다중채널네트워크(MCN) 기업 샌드박스네트워크 등도 인력을 감축했다.


벤처 투자액 1년 새 2.2조→0.8조


코로나19 엔데믹으로 전환되며 업계 상황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기 비대면·디지털 경제가 활성화하면서 IT 스타트업 등에 뭉칫돈이 흘러들었지만, 최근엔 디지털 경제를 견인할 동력이 대부분 사라진 데다가 높은 인플레이션 등의 여파로 투자자들이 지갑을 닫았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벤처투자액은 881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조2214억원보다 60.3% 감소했다.〈그래픽 참조〉 특히 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 74.2%(7688억→1986억원), 게임 73.7%(746억→196억원) 등 감소 폭이 큰 것으로 집계됐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대기업으로 돌아가는 젊은 직장인이 늘어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헤드헌팅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10년 차 개발자 연봉은 8000만~1억원 중후반 수준으로 격차가 아주 큰 것은 아니다”며 “하지만 스타트업은 스톡옵션을 지급해 기업공개(IPO) 때 소위 ‘대박’을 낼 수 있었는데, 업계가 어렵다 보니 그런 메리트도 지금은 없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제 ‘판교 오징어배’ 얘기는 옛말


스타트업 내부에서도 동요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개발자 김모씨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개발자는 몸값은 부르는 게 값’이란 말이 돌았는데, 최근엔 이직하며 연봉을 높이는 건 고사하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잘리지만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개발자 김모씨는 “약속했던 성과급을 다 못 받을 것 같다”며 “아직 연봉 협상도 못 한 상태다. 직원들 사이에선 ‘이러다 연봉이 줄어든 거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판교 기업의 일하는 문화도 바뀌고 있다는 견해가 나온다. 요컨대 “‘판딧불이’(밤새 일하며 판교 일대를 밝히는 개발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판교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A씨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해 한때 ‘판교 오징어배’ ‘판교 등대’ 등으로 불렸는데, 이젠 옛말이 된 것 같다”며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에만 반짝 사람이 붐빈다. 최근엔 야근도 줄었는지 저녁시간에도 오는 손님이 없어 우리도 영업시간을 줄였다”고 했다.

24일 오후 경기도 판교에 있는 유스페이스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판교 테크노벨리 전경. 전민규 기자


“옥석 가리되 중장기 투자 이어져야”


전문가들은 ‘스타트업 버블’이 꺼지고 있는 징조로 해석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팬데믹 시기엔 실제 사업능력이나 성과와 관계없이 전반적으로 투자 붐이 있었다”며 “젊은 직장인에겐 스톡옵션 같은 추가적 이윤 기회와 성과보상 체계에 관심이 쏠렸지만, 단기간에 사정이 악화하면서 다시 살길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채호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스타트업 특성상 경기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당장 ‘생존 모드’에 돌입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기업 자체로 자생력을 갖추는 한편 스타트업 생태계가 위축되면 경기 회복 국면에서도 결실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긴 안목에서 투자는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고석현·김수민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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