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십 앞둔 그가 10년 넘게 페북에 매일 글을 올리자 생긴 일
[남해시대 한중봉]
▲ 채규남씨와 멘토 장희종(오른쪽)씨가 중앙경로당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다. 지난 19일 경남 남해군노인복지관 2층에 있는 중앙경로당에서 채규남씨를 만났다. |
ⓒ 남해시대 |
젊었을 때 자식 잘 키우겠다고
아내와 다짐했다.
우리가 살아온 길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지
빚더미에 눌렸어도
커가는 자식들의 모습에서
희망과 행복을 안고 살았다.
나와 아내의 마음을 읽은
자식들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충실히 자라주었다.
자식이 성장하고
우리는 늙었다.
자식들의 효심으로 호강을 한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요동치니
아내가 하늘나라로 날라가 버렸다.
가슴 아프다 깨가 쏟아지게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쪽 날개가 꺾어져 버렸다.
혼자된 나는 어떻게
살라하고 버리고 가버렸나
늙어서 돌아보니 오래도
살았구나
달리면 숨이 차고
걸으면 다리가 아프다
앉으면 눕고 싶다
허리가 아파 온다.
마음만 청춘이지
몸이 뒤따라주지 않는구나.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삶인가 보다
- '노인이 되어'
부부의 날(5월 21일)을 4일 앞둔 지난 18일 채규남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사처곡(思妻曲)이 심금을 울렸다. 기자는 채규남씨와 페이스북 친구(페친)다.
어떤 분인가 싶어 30분가량 그의 페이스북을 정독했다. 그 안에는 아내뿐만 아니라 시(詩), 인생, 가족, 살아가고 있는 경남 남해와 남해사람들과의 소통이 노닐고 있었다.
그중 눈길을 끈 부분이 먼저 떠난 보낸 아내와 그리움이 녹아있는 시 이야기다. 채규남씨의 부인 고 정송자 여사는 13년 전인 2011년 11월 27일 남편 곁을 떠났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8일 만의 벼락이었다. 평생을 서면 회룡에서 보건약방을 운영해 온 그는 스스로를 "아내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 말했다. 3남 1녀를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키웠으나 백년해로할 줄 알았던 아내를 불시에 잃은 상처(傷處)는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짙어졌다.
늙지 않은
당신이 좋습니다.
한 마디 말을 안해도
당신이 참 좋습니다.
항상 배려해 주고
아껴주고
함께 할 수 없지만
늘 마음을 제게 열어 주는
당신이 고맙습니다.
바라지 않는 편안한 미소
가식 없는 따뜻한 가슴
세상에
당신이 있다는 것이
많이 고맙습니다.
보잘것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당신은
내 유일한 쉼이고
내 유일한 희망입니다.
마지막까지 당신의
이름을 불러 볼께요
사랑한다고
- '처음 그리고 마지막 사랑'
상처(喪妻)는 시를 낳았다. 그는 요즘 시 공부에 빠져 있다. 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페이스북에는 '시창작번외특강', '영탄법, 대유법, 설의법 등 수사법 뜻', '명시창작십계명' 등 시 공부 관련 자료가 넘친다. 특히 최고령 시인 황금찬 시인을 좋아한다. 채규남씨의 페이스북에는 황금찬 시인의 시도 있다.
젊은 시절 신춘문예에 당선된 적이 있다는 그의 시와 글들은 수려함을 뽐낸다. 89세 나이에 이런 글을 쓴다는 거 자체에, 게으른 젊은이의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황금찬 시인은 그의 꿈에 나타나 "95세 되면 자기와 같은 수준의 시인이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채규남씨는 젊은이나 노인 모두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배려하신다고 한다. 포근한 어른이다. 항상 정장 차림의 말끔한 인상도 포근함에 무게를 더한다.
▲ 채규남씨는 8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젊은이와 소통하고 있다. |
ⓒ 남해시대 |
채규남씨는 700명이 넘는 친구가 있는 페이스북러다. 2001년부터 남해실버컴퓨터의 선구자 장희종 멘토를 만나 컴퓨터를 배웠고 그 후 페이스북을 알게 된 후 10여년 동안 거의 매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그는 페이스북 활동을 통해 "젊음과 늙음의 두터운 벽 허물고 소통의 중심에 서고 싶다"고 한다.
저는 이렇게 늙고 싶습니다
저는 늙은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추하게
늙는 것은 두렵습니다.
저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고 남을 원망하는
노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욕심에 힘들어하며,
자신을 학대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는
노인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저는 정말 멋지게
늙고 싶습니다.
비록 몸은 늙어 가지만
영혼은 활기찬 젊은이처럼
살고 싶습니다.
눈을 반짝이면서,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넘치는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늘 관대하고 부지런한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어른 대접 안 한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대접받을 만한 모범을
보이는 근사한 노인이 되고 싶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신명나는 삶을 성취하기를
소망합니다.
-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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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남해시대에도 실렸습니다. → 남해를 대표하는 풀뿌리언론 <남해시대> 구독문의: 055)863-3365 후원계좌: 883-01-16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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