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수의 우리 과학 이야기] 세계 최초 우량계 측우기는 문종의 세자 시절 작품

2023. 6. 5.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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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지난 5월 19일은 제58회 발명의 날이었다. 발명의 날은 1957년에 상공부 특허국(현재의 특허청)이 제정했다. 그 유래는 세종 24년(1442년) 5월 19일에 측우기를 이용하여 강우량을 측정하고 보고하는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측우기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雨量計)에 해당한다. 서양 최초의 우량계는 1639년에 이탈리아 과학자인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측우기는 서양의 우량계보다 약 200년 앞서 발명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20세기 초반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을 역임했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그는 1917년에 발간된 『조선고대관측기록조사보고』에서 조선이 서양에 앞서 우량계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서울(한양)이 세계에서 가장 긴 우량관측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렸다. 이어 최남선은 1931년의 『조선역사』에서 측우기를 금속활자·고려청자·훈민정음·거북선 등과 함께 우리 민족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거론했다.

「 서양 최초 우량계 200년 앞서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사용돼
‘장영실의 측우기’는 신화일 뿐
도넘는 미화는 영웅에도 부담

‘푼’ 단위까지 잰 우리 측우기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정에 서 있는 장영실의 동상. 오른쪽에 측우기가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1442년에는 측우기와 주척(周尺)이 표준화돼 중앙의 천문관서인 서운관과 전국 팔도의 감영에 보급되었다. 측우기를 돌로 만든 측우대 위에 올려놓고 비가 내린 뒤 그 속에 고인 빗물의 깊이를 주척으로 읽어 푼(分, 약 2㎜)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런 전국적 우량관측제도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이어지다가 한동안 중단됐으며, 영조 46년(1770년)에 부활한 후 1907년 조선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이 도입될 때까지 계속됐다.

현재 남아 있는 측우기는 ‘금영(錦營) 측우기’로도 불리는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가 유일하다. 그것은 와다 유지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71년에 한국으로 반환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측우대의 경우에는 관상감 측우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통영 측우대 4기가 남아 있다.

그렇다면 측우기는 누가 발명했는가. 대개 측우기 하면 장영실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훗날 문종이 되는 이향(李珦)이 측우기의 창제자라는 것이 정설이다. 장영실이 측우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는 없는 반면, 『세종실록』에는 1441년 4월에 당시 세자였던 이향이 측우기에 관한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술적 수준으로 보면 측우기는 매우 간단한 기구에 해당한다. 장영실과 같이 뛰어난 기술자가 아니더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측우기의 창제자가 문종이라고 해서 ‘조선 시대 최고의 기술자’라는 장영실의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니다. 측우기의 과학기술적 의미는 제작의 난이도보다는 정량적 사고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깡통에 자를 붙였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오히려 비가 얼마나 왔을까를 측정해 보겠다는 발상이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진정으로 장영실을 흠모한다면, 측우기가 아니라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를 부각해야 한다. 자격루는 ‘스스로 때려 주는 장치를 달고 있는 물시계’에 해당한다. 파수호(播水壺, 물을 흘러내리게 하는 그릇)·수수호(受水壺, 물받이 그릇)·잣대·톱니바퀴·자동시보장치로 구성됐다. 이런 부속품들이 서로 정교하게 이어져 시각에 따라 종·징·북이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서 몇 시인지를 알려주었다. 기존의 물시계와 달리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흐르는 물의 힘으로 기계장치가 저절로 작동하면서 시간을 표현했다. 이런 점에서 장영실은 우리나라 시계의 역사를 기계장치의 시대로 끌어올린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장영실의 대표 실적은 물시계

그런데 우리나라 곳곳에는 장영실의 동상이 측우기 모형과 함께 건립되어 있다. 필자는 천안아산역·한국과학기술원·부산대학교에서 장영실상을 보았는데, 세 곳 모두 측우기를 두고 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장영실 동상 옆에 측우기가 아니라 자격루 모형을 제작하여 설치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도 그 정도의 문화적 품격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상 장영실이 이룬 업적이나 그에 대한 평가는 적지 않게 과장되어 있다. 한국의 제1세대 과학사학자 박성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장영실은 세종 때에 있었던 모든 과학기술상의 업적을 주도한 듯 소개되고 있다. 그렇게 설명한 당대의 기록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간의·혼의·혼상, 여러 해시계, 측우기까지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 세종대의 물시계 기술자 장영실은 이렇게 우리 시대의 과학영웅이 되어 있다.”

근거는 없는데 널리 퍼져 있는 얘기를 ‘신화(神話)’라 한다. 이제는 한 개인이 모든 것을 다 했다는 식의 신화를 넘어서야 한다. 신화는 영웅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기울인 땀과 노력을 외면하며 결과적으로는 그 영웅에게도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된다. 근거가 미약한 신화가 재생산되지 않도록 사실을 차근차근 따져보는 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과제인 듯싶다.

송성수=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에서 과학기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산업기술평가원과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을 거쳐 2006년 부산대 교수로 임용됐다. 저서로는 『한국의 산업화와 기술발전』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 등이 있다.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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