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의 공간과 공감] 부끄러움을 치유한다, 베트남 참전 기념벽

2023. 6. 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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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워싱턴 DC는 기념물의 도시다. 링컨 같은 위인이나 세계대전 같은 국가적 사건을 대형건물이나 탑 또는 인물상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한다. 기념물은 공통적으로 거대하고 높이 솟았으며, 인물상은 실제보다 더 생생한 극사실주의 작품이다. 그럼으로써 인물들은 영웅이 되고 기념물은 랜드마크가 된다고 믿었다.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벽은 기존의 통념을 거부해 건물이나 사실적 조형물이 일절 없다. 오직 땅을 파고 내려갔다 올라가는 경사진 길을 만들고, 한편에 세운 벽에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 실종된 5만8000여 명의 이름을 새겼을 뿐이다. 설계안이 공개되었을 당시 “참전용사들을 모욕했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미 정부는 인근에 3명의 참전군인 동상을 세워 무마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2년 재향군인의 날에 공개된 기념벽은 미국인에게 뭉클한 감동을, 건축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공간과 공감

미국인에게 베트남전은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며 의미 없는 치욕의 상처다. 역 V자 모양으로 땅을 절개한 모습을 지식인들은 ‘부끄러움의 상처’라고 표현했다. V자의 두 날개는 워싱턴기념비와 링컨기념관을 향하고 있다. 무엇이 미국의 건국 정신인가를 묻는 역사적 은유다. 140m의 반사되는 검정 석벽은 전쟁이 무엇이었냐고 오늘에 묻는 거울이다. 방문자들은 하나하나 새겨진 이름들을 찾아 어루만지고, 뺨을 비비며 흐느끼고, 탁본으로 간직함으로써 부끄러움을 치유하고 전사자를 추모한다. 국가 공동체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추상적인 공간이며 은유적인 기념물이다.

당시 응모작 1421점 중 최종 당선자는 19세의 중국계 여대생 마야 린이었다. 지금까지도 아동과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환경이나 기후 문제를 위한 디자인에 헌신하고 있다. ‘벽(Wall)’이라 불리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벽은 이동 벽으로 제작되어 미 전역 1000여 곳에 전시됐고, 플로리다 등 6곳에 아예 복제 벽을 세웠다. 마야 린의 벽은 기념물의 새 장르가 되었다.

김봉렬 건축가·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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