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유명강사 수업이 무료다…대치동 안부러운 '공립학원'
지난달 30일 오후 7시, 전북 김제시 검산동의 한 건물 앞에 노란색 셔틀버스가 멈춰 서더니 교복을 입은 학생 19명이 연이어 내렸다. 인근 덕암고와 김제고에서 수업을 마치고 왔다는 이들은 “영어 단어를 다 못 외웠다” “오늘 모의고사 문제풀이 하는 날인가?”라는 대화를 주고받더니 곧이어 건물로 들어갔다. ‘지평선학당’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이곳은 김제시가 운영하는 이른바 ‘공립학원’이다.
지방소멸 대안으로 떠오르는 ‘공립학원’
이날 찾은 지평선학당은 2층 규모 건물에서 125명의 학생이 8개 강의실로 흩어져 국어와 영어, 수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모두 김제 관내에 위치한 4개 고등학교와 8개 중학교에서 온 학생들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주 4일 방과 후 수업을 듣는다. 덕암고에 다니는 김모(17)군은 “중학교 2학년 때 학당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3학년 때 겨우 들어왔다”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보다 더 어렵긴 하지만 수준별 수업이 이뤄져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액 무료에 ‘기회균형’ 선발까지
김제시는 직접 학원과 계약을 맺고 서울 등 전국에서 유명 강사를 초빙해 학생들을 가르친다. 종로학원은 국어·영어·수학·탐구 과목을 가르칠 총 15명의 강사를 김제시에 파견했다. 매년 소요되는 10억원가량의 사업 예산은 김제시의 장학재단 출연금과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최봉석 종로학원 영어 강사는 “오전에 목동 학원에서 재수생을 가르친 뒤 오후 3시에 출발해 6시쯤 김제에 도착한다”며 “서울과 달리 활기차고 발랄한 수업 분위기와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의 의지에 큰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고교 진학 앞두고 이사 가던 학생↓
지평선학당은 인재유출의 원인으로 지목된 고교 진학 분위기도 바꿔 놨다. 학당 관계자는 “그동안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은 고교 진학에 앞서 전주로 이사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평선학당에서도 서울대 진학 등 우수한 대입 실적이 꾸준히 나오면서 전주의 명문고로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지평선학당이 문을 연 2008년에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의 관내 고등학교 진학률은 22.3%에 불과했지만, 이후 꾸준히 상승하며 올해 75.2%를 기록했다. 과거엔 인재 10명 중 8명이 고교 진학을 앞두고 김제를 떠났다면 이제는 그 숫자가 3명 미만으로 줄었다는 뜻이다.
“학습 평등권 침해” vs “농촌교육 현실 외면”
공립학원이 학습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다. 지자체가 명문대 진학 실적을 내고자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구조가 ‘소수를 위한 특혜’라는 것이다. 2008년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공립학원인 ‘옥천인재숙’을 운영하던 순창군수에게 “자치단체가 성적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해 학원을 운영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이고 비입사생 대다수의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향유할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개선 권고를 내리기도 했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은 “지역 공립학원을 통해 육성한 인재는 지역에 정주하지 않고 대학서열의 상위에 위치한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고 전체 고용 구조를 볼 때 취업도 수도권 소재 기업으로 하게 된다”며 “결국 오히려 지역인재 유출을 가속하는 정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립학원을 준비 중인 한 지자체 관계자는 “공립학원이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주고 중·고교생 학부모를 고향에 계속 거주하게 하는 유인이 분명 있다”며 “학생들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진학 실적이 우수한 지역 명문고를 육성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가람 기자 lee.garam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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