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 글을 쓰는 사람이라니 [양민영의 한 솔로]

양민영 2023. 6. 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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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영의 한 솔로]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 페미니스트

[양민영 기자]

 댓글 테러가 예삿일이 되면서 대중은 둔감해졌고 이제는 ‘그래도 되는 일’처럼 여겨진다.
ⓒ 게티이미지뱅크
연재를 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일로 낙담할 때가 있다. 시간과 정신력을 쏟은 글을 공개하지 못할 때가 그렇다. '양민영의 한 솔로'를 연재하는 중에도 이러한 일이 두 번 있었다. 특히 페미니즘을 주제로 쓴 글이, 내용을 대폭 수정했음에도 발행이 취소된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연재를 지속하던 동력을 잃기도 했다.

그 글이 끝내 퇴짜를 맞은 이유가 페미니즘이 주제인 글의 논리 구조가 탄탄하지 못할 경우 댓글로 공격당할 여지가 크다는 거였다. 여기서 그 글의 논리 구조가 정말 허술했나 하는 점이나 편집부의 판단이 옳았는지 따지고 싶지 않다. 내가 쓴 글의 부족함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그 일에 관한 불만을 털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지나간 일을 굳이 들추는 건 나는 결과가 아니라 경험에 관해서 쓰는 사람이고 그 경험의 고유한 가치를 믿어서다.

페미니즘을 주제로 글을 쓰면 그에 반하는 이들에게 공격받는다.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내용의, 그야말로 논리라곤 없는 댓글이 달리고 글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인신공격도 부지기수다. 이들 악플러는 본문을 다 읽지도 않고 제목과 이미지만으로 자기 인생의 어둠과 저열한 쾌감에서 기인한, 오직 타인을 찍어 누르기 위한 조롱을 퍼붓곤 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누구 하나 정돈된 문장으로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

페미니스트를 겨냥한 댓글 테러 현상은 수년 전부터 만연하더니 어느새 현상의 심각성이나 이를 주도하는 이들을 향한 문제의식은 사라지다시피 했다. 테러가 예삿일이 되면서 대중은 둔감해졌고 이제는 더 나아가서 '그래도 되는 일'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페미니즘을 주제로 쓴 글이, 악플러의 공격에 대비해서 논리를 갖출 것을 요구받는다.

빈틈없이 논리적이고 어떤 비난도 받아칠 수 있는 글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누가 그런 글을 원하는가? 애초에 논리 구조를 만드는 목적은 글을 쓰는 사람의 주장을 개진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전제에 근거해서 볼 때 다수의 독자를 설득하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 논리 구조를 탄탄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요구는 상식적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글을 쓰는 근원적인 목적은 개진이지, 방어가 아니다. 방어를 글쓰기의 최종 목적으로 삼을 때 그 글은 안티 페미니스트들이 좋아하는 팩트의 나열을 기반으로 상투적이고 운신의 폭이 좁은 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방어에 용이한 글을 쓰라는 요구가 조금도 낯설지 않다. 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촘촘한 요구와 지시, 세분화된 억압에 익숙할 대로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해서 자부심을 가질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는 꾸짖음이 내내 여성을 따라다닌다. 기를 쓰고 높은 기준에 도달한다고 해서 인정이나 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겨우 비난과 조롱을 면하는 데에 만족해야 한다.

'그쪽'이라니

"그쪽에 관한 글을 쓰시죠?"

5년째 페미니즘을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인터넷 밖에서는 '그쪽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장소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한낮의 카페였다. 조사를 받거나 취조당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등장한 '그쪽'이라는 단어가 수능 언어영역의 단골인 최인훈의 <광장>을 연상케 했다. 전쟁 포로가 된 주인공에게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하고 장교들이 캐묻던 대목 말이다.

'그쪽'이라니, 급진적인 공산주의나 총기 소유, 대마초 합법화에 찬성하는 입장도 아닌데 '페미니즘'이라는 명사로 부를 수도 없는 건가? 게다가 나는 별도의 설명이 없는데도 '그쪽'이 페미니즘임을 알아차렸다. 비슷한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꼭 풍자극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 모든 게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웃지 못할 사상 검증은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상대가 금기시하는 '그쪽'을 직접 언급했으니, 그동안 페미니즘에 관해서 하고 싶던 말을 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거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들 입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것도 솔직하게 말하면 뻔할 뻔 자다. 페미니즘을 금기시하는 이들은 굳이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까닭은 한국식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어서다.

본격적인 성토가 시작되기 전에 잊지 않고 하는 일도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안티 페미니스트처럼 보이면 곤란하기 때문에 '나도 페미니스트지만….' 혹은 '여성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등의 전제를 쿠션처럼 깔아둔다(비슷한 말로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두세 권 읽었다'도 있다).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 당사자성이 결여됐음을 의식하고 쉽게 그것을 획득하고자 덧붙인 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들과의 대화는 공식처럼 일관된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다. 탐정 만화의 주인공이 범인과 마주했을 때 이런 기분일까? 보통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돈을 밝히듯, '나도 여성 인권을 지지하지만…'라고 하고 페미니즘의 문제를 읊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안티 페미니스트다.

그리고 이 예감은, 아직 한 번도 섣부른 추측이나 오해로 밝혀진 적이 없다. 우선 다짜고짜 페미니즘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이들은 페미니즘 전반에 관한 이해가 현저히 낮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문화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흔하게 벌어지는 양성 간의 갈등, 혹은 두 성별이 다른 데서 기인한 여자들의 불만 정도로만 치부한다. 실제로 이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문제점은 다른 게 아니라 페미니즘 때문에 자꾸 주변의 여성들, 여자 친구나 아내와 다투는 데 있다.

나도 묻고 싶다
 
 리베카 솔닛의 저서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 창비
이런 레퍼토리의 성토가 시작되면 나는 일종의 민원 접수처가 된다. 처음에는 이들이 제기하는 불만을 들어주고 페미니스트로서 나를 변호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응대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이들은 페미니즘의 문제에 관해서 대화하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에서 페미니스트를 만났을 때 휘두르려고 품고 다녔던 회초리를 꺼냈을 뿐이라는 걸.

리베카 솔닛은 그의 저서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집단이란 물 샐 틈 없는 범주이고 그 속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사고방식, 신념, 나아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생각이 차별의 핵심 요인'이라고 했다.

그 결과 여성은 누구든 걸어 다니는 여성 대표처럼 취급받기 쉽고 남자들은 비교적 그런 판단에서 자유롭다. 리베카 솔닛의 주장을 근거로 보면 여성이자 페미니스트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내가 반복해서 겪는 일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페미니스트를 유리한 것만 골라 취하는, 이기적인 체리피커라고 몰아세운다. 어떤 이는 페미니스트가 세상을 잘 몰라서 지나치게 이상적인 목표만 쫓는다고 한다. 어떤 이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피해의식에 젖은 패배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어떤 이들은 사회 갈등을 조장하고 물의를 일으킬 만한 파급력을 가진 집단이라고 매도한다. 또 그들 시각에서는 무능력한 여성 집단의 일원인데 문제점을 지적할 때는 해결책까지 제시하라는 요구도 받는다.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 이번에는 나도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란 대체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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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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