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벗은 여자만 쳐다본다면 이 그림의 반쪽만 본 겁니다 [진혜윤 교수의 미술, 도시 그리고 여성]

진혜윤 2023. 6. 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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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가 그린 19세기 파리의 모더니티 <올랭피아>

진혜윤(한남대 회화과 교수)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863)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1863)는 19세기 파리 사회를 경악에 빠뜨린 문제작이다. 이유는 그림 속 주인공이 벌거벗은 매춘부였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누드를 재현하려면 적어도 사랑과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그렸어야 하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풍만한 몸을 타고 흐르는 우아한 곡선이 돋보이는 여신의 나체가 시대가 허락한 이상적 여성상이었다.

하지만 마네가 그린 매춘부는 핏기없이 창백하고 볼품없이 말랐다. 게다가 그림 밖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다. 민망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도발적으로 되받아친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서둘러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그림을 감상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보아도 이러한데 이 그림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오죽했을까.

그렇다면 마네는 왜 사회적 금기를 깨고 매춘부를 그렸을까? 자극적인 화제성에 기대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서였을까? 흥미롭게도 최근 연구는 마네가 단순히 벗은 몸의 매춘부만을 그린 게 아니란 사실을 화면 오른쪽에서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는 흑인 하녀를 통해 증명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863)의 일부분.
 
지금까지 이 그림에서 흑인 하녀는 주목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검은 피부의 그녀는 새하얀 피부의 그림 속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적 요소로 여겨져 왔을 뿐이다. 우리의 관습화된 시각은 조연보다 주연에 비중을 두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이 그림에 대한 분석은 그림 속 주인공의 머리에 꽂힌 난초, 목에 두른 초커, 손목에 찬 팔찌, 한쪽 발에만 걸친 비단 슬리퍼, 그리고 '올랭피아'라는 흔한 가명 등 그녀가 파리의 매춘부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단서를 이해하는 데에 집중되어 왔다. 그런데 흑인 하녀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숨겨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흑인 하녀에게 옷을 입힌 이유

흑인 하녀의 실제 이름은 '로르(Laure)'다. 올랭피아로 분한 '빅토린 뫼랑(Victorine Meurent)'처럼 전문 모델로 활동했던 로르는 마네의 또 다른 두 점의 작품에도 등장하는데 보모 또는 하녀로 그려진 그녀는 모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다. 그녀는 오프숄더 스타일을 어깨 위로 끌어올려 입은 듯 넓은 넥라인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당대 회화 속 흑인 하녀가 젖가슴은 드러낸 채 강렬한 색조의 헤어 스카프와 긴 치마를 두른 식민지 노예로 표현되었던 것과 사뭇 상반된 모습이다.
 
 장 레온 제롬 <무어 여인의 목욕>(1870). 마네의 <올랭피아>와 같은 시기에 그려진 이 작품에서 흑인 여성은 상의를 입지 않은 노예로 표현되고 있다.
 

마네는 그녀를 흑인 하녀를 대하는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일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한 여인으로 대했다. 신화 속 여신의 누드 대신 현실 세계의 매춘부를 그렸던 그는 로르 역시 서구인들의 이국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근대 도시 파리의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의 모습으로 그렸던 것이다.

마네가 살던 19세기 중엽 파리에서 흑인의 비율은 1848년 프랑스 식민지 노예 제도가 폐지된 이후 대폭 증가했다. 이렇게 유입된 이주민 중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활동은 하녀, 가정부, 또는 여공 정도에 국한되었다. 남성을 동반하지 않으면 외출조차 어렵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흑인 이주 여성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마네는 자유를 얻었지만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로르의 삶을 올랭피아와 동일선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마네의 프랑스는 왕정과 공화정을 오가는 정치 사회적 혼란기였고, 동시에 산업혁명을 통해 농업 중심사회에서 기계 공업 중심사회로 전환되는 대변혁기에 놓여있었다. 더 나아가 프랑스의 마지막 군주이자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시장으로 임명한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을 통해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자신의 재임 기간 전반에 걸쳐 도시 개조 사업을 추진하면서 중세도시로 남아있던 파리를 세계 최초의 근대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넓은 대로가 생겨나고, 균일한 디자인의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혁신적인 교통망이 구축되는 등 근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거대 도시로 급부상한 파리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전에 없던 물질적 풍요와 시간적 여유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러한 혜택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극심한 빈곤과 가난이 뒤따랐다. 특히 여성의 경우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1862)이 묘사하는 비운의 여인들처럼 생활전선에 내몰리다 매춘부로 전락하는 삶이 적지 않았다.

파리에는 수많은 올랭피아와 로르가 존재했다. 마네의 <올랭피아>에 등장하는 매춘부와 하류 여성 노동자의 모습은 19세기 파리가 경험하는 현대적 삶의 실상을 가감없는 시선으로 관찰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마네는 파리의 근대적 변화에 열광하던 부르주아들이 가장 외면하고 싶었을 현실을 들춰내 직시하게 만들었다.

두 여자 모두 주인공이 된 화면분할

게다가 마네는 올랭피아와 거의 동일한 회화적 공간을 로르에게 할애했다. 화면 좌측이 올랭피아의 공간이라면, 우측은 로르의 공간이다. 주인공을 부각시키려면 배경 인물은 최대한 멀리 두고 작게 그렸어야 할 텐데, 로르는 올랭피아만큼이나 가깝게 느껴진다. 르네상스 이래 근 450년간 서양회화가 고수해 온 원근법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근법은 캔버스라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감을 창조하기 위해 고안된 회화적 장치이다. 마네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공간적인 깊이감을 거부한 것이다. <올랭피아>를 그릴 때 마네가 참고한 것으로 알려지는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4)와 비교해 보면, 같은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마네의 화면이 훨씬 얄팍하고 판판하게 보인다.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4)(왼쪽)와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1863).
 
그는 로르를 전진 배치하고 그녀 뒤로 커튼을 쳐서 환영적인 공간으로 보일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 또, 중간톤의 범위를 넓혀 풍부한 양감을 표현하는 대신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평면성을 극대화하였다. 이 그림에서 우리의 시선이 올랭피아에만 이끌렸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치 강렬한 핀 조명을 올랭피아에만 비춘 듯한 연출로 인해 로르는 자연스럽게 어둠의 공간으로 밀려나 보이게 되는 것이다.

마네는 주제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기존 화단이 오랜 시간 지켜온 규범에서 탈피했다. 전통을 벗어나는 그의 파격적인 시도를 기반으로 이제 회화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릴 것이냐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이로써 서양미술사는 마네 이전과 이후의 시간으로 나뉘게 된다. 마네 이후로 회화의 의미는 재정의되었고, 현대미술로 나아가는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하게 된다.

로르를 통해 다시 보는 <올랭피아>는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마네가 이뤄낸 혁신의 반쪽만 보아왔는지 깨닫게 한다. 그는 당연하게 여겨져 온 것들을 당연하게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여태껏 그 누구도 거스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도를 과감하게 실행했다. 그의 그림은 현실의 명암에서 명에만 주목하는 우리의 나태한 시각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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