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그 이후, 보복의 두려움에 더 고통받는 '피해 생존자들'

이준목 2023. 6. 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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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KBS 1TV <시사 직격> '범죄 그 이후, 나는 범죄 피해 생존자입니다'

[이준목 기자]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매년 발생하는 살인, 강도, 폭력, 성폭행 등의 강력 범죄는 연간 40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끔찍한 범죄만큼이나 안타까운 것은, 억울한 피해를 당하고도 또다른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피해자들의 현실이다.

2일 방송된 KBS 1TV <시사 직격> ‘범죄 그 이후, 나는 범죄 피해 생존자입니다' 편은 사회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2차 가해 위협에 시달리는 피해 생존자들의 현실과 보복범죄의 위험성을 조명했다.

‘범죄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산을 빼앗기고 몸에 상처를 입고, 명예를 훼손되는 것을 흔히 범죄 피해라고 한다면 그 끝은 어디인가. 대부분의 범죄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범죄를 당한 순간만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가 검거되고 수사와 재판이 시작된다고 해도 피해자가 그 후유증으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통상적으로 피해자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범죄 피해라는 충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가리켜 ‘범죄 피해 생존자’라는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끔찍한 범죄를 당하고도 살아남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지만, 이들을 좌절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범죄 이후의 2차 가해였다. 전문가들은 현재의 형사소송법 체계를 피해자 보호 쪽으로 구현하는 것, 덧붙여 2차 가해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지난 4월 18일, 부산에서 22년째 노래주점을 운영하던 이씨는 한 손님에게 전치 6주의 폭행을 당했다. 중상을 입은 이씨는 몇 주째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해자는 당시 주점을 찾은 단체손님의 일행이었고 경호업 관계자라는 것만 알려졌다.

피해자 측은 아직도 가해자 측의 신상과 정확한 폭행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가해자 측에서는 오히려 피해자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오거나 지인들이 병원을 찾아오기도 했다고. 피해자 측에 먼저 연락하며 가해자를 본인의 경호실장이라고 밝힌 지인은, 자신의 지위를 ‘총재’라고 과시하며 반말과 고압적인 태도로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사실을 추궁하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총재라는 인물은 정작 제작진이 연락을 취하자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했다.

경찰은 당시 가해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는 했지만 피해자 측에 자세한 내용은 개인정보라서 알려줄 수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들이 가해자 측의 접근에 불안을 호소해도 ‘피해를 입으면 다시 신고하면 된다.’는 무성의한 답변만 돌아왔을 뿐이었다고.

성폭행 피해자 박미영씨(가명)는 친한 누나-동생으로 지내던 지인의 집에 놀라갔다가, 그와 선배라는 두 남자에게 번갈아 강간을 당했다. 2인 이상이 합동한 특수강간은 일반 성범죄보다 가중처벌이 주어진다. 박씨는 두 남성을 고소했지만 가해자들은 특수강간 혐의만은 피하기 위하여 모의는 없었다고 부정하고 있다. 피해자가 합의를 거부하며 가해자는 2심에서 불과 7년형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과하다며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였다.

박씨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가해자 측이 지속적으로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는 것. 박씨는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나가서 평생 함께 있어주고 싶다’는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가해자의 뻔뻔함에 분노를 드러냈다. 심지어 가해자 최씨의 아버지는 “우리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다”라고 혐의를 부인하면서 법정에서 만난 피해자에게 접근을 시도하고 피해자의 연락처를 알아내 아들이 쓴 편지를 전달하며 선처를 요구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박씨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해까지 시도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병원에서 제작진을 다시 만난 상황에서도 여전히 가해자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대전에 거주하는 홍정은씨(가명)는 가정폭력 피해자였다. 홍씨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전 남편과 2019년 이혼했으나 이후로도 지속적인 스토킹에 시달렸고 급기야 지난해는 집을 찾아와 돌연 행패를 부리면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전 남편은 칼을 들고 홍씨를 위협하다가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하지만 법원은 놀랍게도 전 남편을 집행유예로 풀어줬고 스토킹 혐의는 기각됐다. 홍씨는 시누이의 지속적인 회유와 강요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써준 것이 화근이 됐다. 스토킹은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전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과 악몽에 시달리던 홍씨의 선택은, 결국 이사를 하고 아이들의 주민등록 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 죄없는 피해자가 죄지은 가해자를 피하여 숨는 것이 그나마 최선이라는 게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유혜선씨(가명)는 40년 가까이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남편 송씨는 일은 안 하고 술과 유흥을 즐기면서 걸핏하면 아내와 자녀들을 무차별로 폭행했다. 유씨는 그럼에도 오랜 세월을 참고 견딘 이유에 대하여 “아이들이 밖에서나마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보호막이 된다는 마음이었다"고 고백했다.

유씨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일기를 통하여 남편의 폭력을 기록해놓은 일지는 법원에서 가정폭력의 중요한 증거로 인정됐다. 송씨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유씨는 이혼에 성공하며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 3월 송씨가 가석방 대상자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유씨와 자녀들은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송씨는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분노와 원망을 드러내며 유씨와 다시 재결합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가족들은 이를 또다른 협박으로 받아들였다. 가족들의 반대로 가석방은 무산되었지만 올해 12월이면 형기가 만료되어 출소를 앞두고 있다.

김태경 상담심리 전문가는 “보복범죄는 가정폭력이나 아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많다”고 설명하며 “화가 나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게 감정의 속성인데, 자기가 화난 만큼 상대에게 응징하지 않으면 감정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느끼는 성향의 사람들이 보복범죄를 저지른다. 화풀이를 할 대상이 접근가능한 위치에 있다면, 보복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이라며 구조적인 위험성을 지적했다.

보복범죄가 우려되는 피해자에게는 경찰의 안전조치가 이루어진다. ‘안만나 프로젝트’는 피해자에게 경찰이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지속적인 연락과 위치파악을 통하여 가해자와의 대면을 방지하는 보복범죄 예방대책이다.

하지만 스마트워치의 정확도와 실효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스마트워치를 보유한 피해자가 긴급신고를 하고도 끝내 보복범죄를 막지 못한 사례들이 속출하면서 불안감을 자아냈다.

2020년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112시스템(기지국, GPS, 와이파이) 위치파악 확률은 기지국이 94.1%로 가장 높았는데 문제는 오차범위가 2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로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것. 2021년 경찰이 긴급신고를 받고도 엉뚱한 위치로 출동하여 피해자가 끝내 사망했던 사건 역시 기지국 방식의 위치추적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심지어 가장 정확도가 높다는 GPS조차도 야외가 아닌 건물이나 지하로 들어갔을 때는 추적에 한계가 있었다. 경찰 측은 기술력의 발전으로 새로이 보급되는 신형 스마트워치에서는 위치추적의 정확도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전문가들은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국 코네티컷주에서는 2010년부터 2013년까지 고위험범죄자와 피해자에게 동시에 GPS 추적장치를 지급한 실험 결과, 연평균 15명에 이르던 가정폭력 사망자가 3년간 0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허민숙 국회입법처조사관은 “정부는 피해자에게 꼭꼭 숨어있어라. 가해자의 눈에 띄지 마라'는 식의 제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 감시를 가해자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해야한다”며 “가해자가 내가 감시받고 있구나.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큰일나겠구나. 두려움과 공포를 가해자에게 줬는가 이 사회가. 그래서 범죄를 예방하려는 노력을 해왔는가 이러한 질문을 정말 크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보복범죄는 가중처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며 2018년 268건이던 것이, 2021년에는 434건까지 오히려 크게 폭증했다. 일선에서는 예산과 인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피해생존자들을 위하여 가해자에 대한 신속한 수사와 정당한 처벌, 피해자에 대한 지원, 또다른 2차가해와 보복범죄로부터 지속적인 보호를 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2022년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을 통하여 보복범죄의 위험성과, 사회 시스템이 피해 생존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가해자 전주환은 3년이나 피해자를 스토킹 해왔고 그로 인하여 실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앙심을 품고 피해자를 끝내 살해했다. 피해자측 변호인이었던 민고은 변호사는 피해자가 생전에 가해자로부터 받았던 회유와 협박을 고백하며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면서 울먹이면서 손이 떨리던 피해자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며 안타까워했다.

당시 법원은 놀랍게도 전주환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다. 신원이 확실하고 증거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피해자는 몇 번이나 고소와 탄원을 거듭했지만 전주환은 끝내 구속되지 않았고, 우려한 대로 판결이 나오기 하루 전에 피해자를 찾아가 잔인한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민 변호사는 ”9년 구형을 받은 가해자가 도망가거나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할 여지가 충분했다. 재판 과정에서 중간에라도 구속영장에 대한 청구나 고민이 있었어야 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1심에서 40년형을 받은 전주환은 형이 과하다며 항소한 상태다. 전주환은 어려운 가정형편과 우울증 경력을 내세우며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피해자 유족 측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며 전주환의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모으고 있다.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 등과 관련된 보복범죄는 최근에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보복살인이 계속되는 사회에서 과연 피해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신고를 할 용기를 낼수 있을까. 가해자로부터 강요된 합의를 거부하고 강력한 처벌을 말할 수 있을까. 범죄피해생존자가 범죄피해에서 벗어나 진정한 생존을 찾을 수 있도록 보복범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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