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앞에서 모욕당할 수 있다'... 서울에 붙었던 경고문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기자]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배급 포스터 |
ⓒ 미 국가기록원 |
희소한 물품이나 서비스를 국가가 통제하여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제도를 배급제라고 한다. 근대 사회에서 배급제는 전쟁으로 인한 물품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857년 인도 독립전쟁 당시 고립되었던 영국인 거주지 러크나우(Lucknow) 지역에서 식료품 배급제를 실시한 것이 기원이다.
배급제는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에서 계획 경제의 하나로 시행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사회주의 국가만의 고유한 정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배급은 무료인 것이 일반적이지만, 유료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건을 살 권리, 혹은 시설을 이용할 권리를 배분하지만 유료인 경우도 많다.
배급제는 가격 안정이나 평등한 소비를 가져오는 장점도 있지만 암시장의 형성이나 생산 의욕의 저하 등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단점도 적지는 않다. 북한이 금세기 초에 경제발전을 추구하면서 배급제를 대폭 축소한 배경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일반 가정에 커피를 배급제로 나누어주는 나라는 쿠바가 유일하다. 1인당 한 달에 100그램씩의 원두를 나누어주는 전통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 초기부터 70년 가까이 유지되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도 80년 전에 커피 배급제를 실시한 적이 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의 참전이 본격화되면서 커피 가격이 불안해졌다. 군대에서의 커피 수요가 증가하고, 선박을 이용한 커피의 수송이 불안해지자 커피 가격이 급등할 조짐이 보였다. 커피의 나라 미국이 선택한 것은 일반인에 대한 커피 배급제였다.
배급제는 생필품 중 특정 품목이 희소하여 가격 급등이 염려되는 경우에 실시된다. 미국에서 커피 배급제를 시작한 첫 번째 이유였다. 기호품을 모든 시민에게 공평하게 배급하고자 하는 생각이 배경이었다. 다른 이유는 부족한 물품이었던 커피를 군대에 우선 배정하고자 하는 이유였다. 1942년 11월에 시작된 커피 배급제는 유럽에서 전세가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1943년 7월까지 유지되었다.
국가는 배급제를 선택하였고, 미국 국민들은 커피를 묽게 마시는 습관을 선택했다. 적은 양의 커피에 많은 양의 물을 섞어서 마시는 방식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익숙해진 묽은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전쟁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아메리카노의 탄생 배경 중 하나이다.
해방과 함께 들어온 전혀 다른 커피
해방이 되자 사라졌던 커피가 다시 돌아왔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던 커피 대신 미국을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커피였다. 커피가 들어오는 루트가 바뀐 것뿐만 아니라 커피 자체도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 사용하는 커피 재료는 물과 함께 끓인 후 걸러서 마시는 원두 혹은 원두 가루였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들어온 커피는 전혀 다른 커피였다. 뜨거운 물에 넣으면 녹는 인스턴트커피였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에 브라질의 의뢰로 스위스 네슬레사에서 개발한 네스카페가 그 원조였다. 이후 1945년에는 미국의 제네럴푸드에서 맥스웰하우스라는 이름의 인스턴트커피를 시판하기 시작하였다.
해방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커피 재료는 인스턴트커피였다. 번잡한 과정 없이 끓는 물만 있으면 향기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다. 수만 명의 미군들과 함께 미국 물품이 밀려왔다. 1946년 3월 20일 소련군정의 남조선정세보고서에 따르면 인천항에는 옥수수, 육류, 식용유, 커피 등 미제 식료품이 쌓여 있었다.
커피가 넘치면서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 양풍이라서 배격하였던 커피가 이제는 유행의 첨단을 상징하는 물품이 되었다. 커피가 주는 매력에 너나없이 빠져들었다. 특히 여성들의 커피 사랑이 유별났다.
1946년 가을 서울 시내에는 인쇄된 경고문이 날아다녔다. 몇 가지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대중 앞에서 모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서양인과 차량에 동승하는 여성, 짧은 영어로 서양인에게 윙크하는 여성, 껌을 씹으며 배회하는 여성, 야간에 서양인에게 속삭이는 여성, 그리고 커피와 초콜릿에 미쳐 댄스홀에 가는 여성이었다. 공짜 커피를 마시기 위해 미군 전용 댄스홀을 찾는 여성이 있을 정도였다.
1946년 봄이 되면서 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감도가 갑자기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점령군의 가치는 정점에서 떨어지는 시점에 도달하였다. 점령군의 지속적인 주둔은 제국주의적인 의도로 해석될 것이다"라고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 1947년 11월 23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구하라 백여만 실업자' |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휴대식량 상자는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전투용으로 만든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필요성이 사라진 물건이었다. 마치 조선의 식량부족 문제에 도움을 주고자 펼치는 선심 정책으로 발표하였지만 실상은 필요성이 없어진 전투용 식량의 처분이었다.
배급제였지만 무료가 아니라 유료였다. 베이컨, 훈육 햄, 감자, 고기, 쌀, 설탕, 우유, 마멀레이드, 담배, 비스킷, 비누, 종이, 수건, 초콜릿, 껌, 소금 등이 들어 있는 상자 하나 가격은 100원이었다.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한 배급제가 아니라 가난한 가정만을 대상으로 한 배급이었다. 배급을 받으려면 서울시 부윤(부시장)이 발급한 증명서를 제시해야 했다. 극빈한 가정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증명서를 받아야 미군정청이 판매하는 휴대식량 상자를 구입할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려면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희한한 세상이었다. 이렇게 구입한 커피는 다른 미제 물건과 함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가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유료로 배급된 휴대식량 상자에 담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담배를 포함한 이른바 양담배는 피우는 것은 물론 소지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미군정청은 불법인 물건을 팔아야 했다. 미군정청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다른 양담배는 몰라도 미군이 식량 배급으로 판매한 담배의 경우 조선인이 피워도 미국 헌병이 잡아가기는커녕 간섭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책 지침을 함께 발표했다. 무엇이 합법이고, 무엇이 불법인지가 모호한 세상이었다.
당시 배급 형식으로 경성의 공인된 빈민 가정에 나누어진 휴대식량은 5만 2천 상자였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여기에 들어있던 커피는 40그램짜리 5만 2천 통, 총 2톤이 조금 넘는 분량이었다. 50만 잔의 커피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었다. 식량은 부족하고 물가는 비쌌지만 커피가 넘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동아일보> 1947년 11월 23일 자에는 '구하라 백여만 실업자'라는 제목의 특집이 실렸다. 실업자가 넘치는 서울에서 "거리의 항구, 실업자와 모리배의 오아시스"인 다방에는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50원짜리 커피를 앞에 놓고 벽만 바라보고 있는 실업자 군상을 한탄하는 기사였다. 당시 서울에서 영업 중이던 100여 개의 다방에는 하루 평균 350여 명, 시내 다방 전체로는 3만여 명이 다방을 찾아 커피 한잔을 마셨다. 커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런 모습으로 출발하였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교육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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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동아일보> 1947년 11월 23일 자. <소련군정의 남조선정세보고서> 1946년 3월 20일. <주한미군사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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