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여섯 형제 사이에 태어난 소녀, 말 없던 이유
[장혜령 기자]
▲ 영화 <말없는 소녀> 스틸컷 |
ⓒ (주)슈아픽처스 |
아이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코오트(캐서린 클린치)는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왔다.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한 엄마의 막달. 먼 친척 집에 맡겨진다. 사는 곳과 너무 다른 그곳에서 짧은 여름을 보내는 동안, 받지 못한 보살핌과 앞으로도 없을 다정함을 접하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작은 관심에도 크게 자란다. 제대로 된 보호와 교육을 해주지 않는 가정에서 자란 코오트는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하고 공부마저 또래보다 뒤처진다. 그럴수록 학교 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집에서도 같이 노는 형제자매 없이 겉돌기만 한다. 한 마디로 학교와 집 모두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전혀 없는 상태다. 차갑고 쓸쓸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있는 코오트의 미래가 괜히 걱정된다.
태어날 때부터 말이 없었던 게 아니었을 거다. 가난에 찌들어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가르치지도 못하는 형편이 누적된 결과였을지도. 육아와 가사로 늘 피곤함에 지친 엄마, 화가 많고 제멋대로인 아빠 사이에서 스스로 말을 줄인 조숙한 아이가 되어갔을 거다. 특히 아빠의 가부장적인 억압은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 억눌린 자아를 형성하게 할 것이다.
▲ 영화 <말없는 소녀> 스틸컷 |
ⓒ (주)슈아픽처스 |
이 안쓰러운 아이가 자유롭고 포근한 가정에서 자란 여름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법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뜨거운 환대에 데어 상처가 되어간다. 환상의 나라에 발 들이면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뜨거운 목욕물, 조용하고 포근한 침대. 대가 없이 오롯이 호의로 맞아주는 어른을 처음 본 코오트는 어리둥절했지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친밀함을 쌓아간다. 상처는 아물어가고 서서히 성장하게 된다.
시작은 아줌마 에이블린(캐리 크로울리)였다. 혼자 다 차지해도 괜찮은 욕조에 기분 좋은 마사지로 온몸 구석구석 씻겨 준다. 머리도 백번 넘게 빗겨 주고, 맛있고 따스한 음식을 내어주며 상냥함을 가르친다. 이부자리에 실례를 해도 자신의 불찰을 꾸짖는다. 아이가 부끄러워할 것을 생각한 아줌마의 작은 배려다.
반면, 아저씨 션(앤드루 베넷)은 좀 무뚝뚝한 성격이다. 좋지만 겉으로는 한없이 차갑게 대하는 츤데레다. 그런 아저씨가 처음에는 무척 겁났지만 은근 챙겨주는 마음씨가 소녀의 얼음장 같은 마음을 녹인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진심이 느껴진다. 둘은 말 없이 서로의 친구가 되어간다.
▲ 영화 <말없는 소녀> 스틸컷 |
ⓒ (주)슈아픽처스 |
세상을 살다 보면 '말' 때문에 많은 일이 생긴다. 한 마디 때문에 흥하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 때문에 망하기도 한다. 참지 못할 상황에서 할 말은 꼭 해야 하지만, 말 없는 침묵이 더 큰 힘을 내기도 한다. 영화는 코오트가 말을 아끼는 이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원작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일찍 철들어 버린 아이는 모르는 듯 보여도 적절한 타이밍을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남들 눈에는 그저 조숙한 아이,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순한 아이로 보이겠지만. 보고 들은 것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진중한 성격을 지녔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별종 같아 보여도, 사려 깊은 마음씨를 가졌음을 어른들은 알고 있다.
<말없는 소녀>는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중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지만 작가 특유의 절제된 언어로 만들어진 따스한 세상 속에서 소녀와 나이 든 부부의 특별함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다정다감한 노부부는 '빨간머리 앤' 속 남매의 부부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무어라고 설명하기 힘든 벅찬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원작의 큰 각색 없이 영상으로 옮겼으며 영어가 아닌 아일랜드어로 제작되어 언어의 고유성도 지닌다. 80년대 농가의 서정적인 분위기가 어우러진다. 원작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책장을 차마 닫을 수 없을 정도의 여운이 오래도록 이끄는데, 영화의 엔딩이 이를 잘 표현했다.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명확하게 선 긋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여유로운 정서가 흐른다. 그리고, 아끼고 아꼈다가 드디어 토해내는 코오트의 단어에서 전율은 극대화된다. 쉽게 잊기 힘든 올해의 엔딩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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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장혜령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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