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문맹이 낳은 9만 원짜리 식사
장기 세계여행을 나섰습니다. 여행지에서의 한 끼 식사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음식 한 접시는 현지인의 환경과 삶의 압축판이요 정체성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김상희 기자]
▲ 디종 근교?쿠체이(Couchey) 마을의 메종을 개조한 숙소 |
ⓒ 김상희 |
프랑스에서 50대 아줌마 셋이 차를 덜컹 빌려 버렸다. 디종 숙소에서 시작한 나비의 날갯짓은 차를 빌려 부르고뉴의 와인루트를 따라가다가 본느(Beaune), 마콩(Macon), 안시(Annecy)를 거쳐 리옹(Lyon)까지 내려간다는 태풍 계획을 가져왔다.
디종에서 10km도 채 안 떨어진 쿠체이 숙소까지 어떻게 차를 몰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차를 받아 든 순간 묵직한 걱정 덩어리까지 같이 안겨 받았다. 차가 내 발에 자유를 달아준 게 아니라 족쇄를 달아 준 기분이다.
▲ 진짜 프랑스는 시골에 있는 듯. 디종 근교 쿠체이 마을에서 |
ⓒ 김상희 |
▲ 부르고뉴 지역의 와인 루트변에 펼쳐진 포도밭 |
ⓒ 김상희 |
우리나라에 논 평야가 있다면 부르고뉴에는 포도밭 평야가 있다. 눈앞은 포도밭 지평선과 포도밭 구릉뿐이었다. 이른 봄이라 무릎 아래의 키 낮은 포도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포도나무 밑동에서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포도밭 사이사이에 노란 물감을 부어 놓은 듯 유채밭도 눈이 부셨다.
쿠체이 마을에서 출발해 본느를 거쳐 두 시간쯤 달렸을까. 식당이 있을 법한 마을로 들어갔다. 골목 입구에서 요리 2개에 30유로라는 입간판을 보고 식당에 들어갔다. 명색이 와인 루트를 달리는 중이니 와인도 한 잔씩 주문해야지!
▲ "버터 꽃이 피었습니다~" 주문한 요리 전에 나온 것들과 식전 빵 |
ⓒ 김상희 |
드디어 내가 주문한 푸아그라와 관자 요리를 포함해 음식이 나왔다. 우리에게 서빙되는 건 음식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먹는 게 이렇게 예쁜 건 반칙이 아닐까 싶을 만큼 데코레이션이 섬세했다.
▲ 스타터 요리들(왼쪽은 푸아그라, 오른쪽은 이름을 모름) |
ⓒ 김상희 |
▲ 메인 요리였던 조개 관자 요리, 생선 요리, 돼지고기 요리 |
ⓒ 김상희 |
▲ 커피와 함께 제공된 한입거리 달콤한 것들, 카페 구르망 |
ⓒ 김상희 |
계산을 치르고도 믿기지 않아 영수증과 메뉴판을 번갈아 보았다. 아하! 우리가 먹은 메뉴는 1인당 30유로가 아니었다. '2개 요리 30유로'란 말 뒤에 적힌 '평일 점심만 가능'이란 말을 놓친 것이었다. 그날은 일요일 점심이니 우리는 3코스짜리 38유로 식사를 제공받은 것이었다.
▲ 식당 메뉴판의 압박... 꼬부랑 필기체 불어는 구글도 잘 못 읽어요. |
ⓒ 김상희 |
어쩐지 이것저것 많이 주더라. 우리는 와인과 함께 아뮤즈부쉬, 앙트레, 스타터, 플라(메인요리), 카페 구르망을 먹은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명품 와인 '지베리 샹베르탱(Gevery Chambertin)'을 생산하는 지브리(Givry) 마을이었고, 그날 마신 와인은 상위 1.4%의 와인에게만 부여한다는 최고 등급 그랑 크뤼까지는 아니어도 상위 10%에 들어가는 2등급 프리미어 크뤼의 와인이었다.
한 마디로 오늘의 과(過)한 다이닝은 프랑스어 문맹이 가지고 온 행복한 참사였다. 그동안 열흘 넘게 단품 식사와 직접 해 먹은 끼니로 절약한 식비를 오늘 점심으로 보상받았다고 쳤다. 맛있게 폼나게 기분 좋게 먹었으니 파인 다이닝(Fine Dinning) 아닌가.
파인 다이닝 효과인지 차도 잘 달려 주었다. 유료도로 톨비 내는 방법이 무서워 무료 도로만 돌아다니다가 실수로 유료도로를 타게 되었다. 닥치니까 다 하게 되더라. 통행권 뽑고 카드 꼽고 요금 내고... 안시에서는 셋이서 주차 기계랑 삼대일로 씨름한 끝에 주차비 내고 차도 세웠다. 그리하여 렌터카 빌린 지 삼일 만에 종착지 리옹역까지 달려 간신히 차를 반납했다.
차를 돌려주고 나니 어찌나 홀가분한지 날아갈 것 같았다. 차 없으니 이렇게 좋은데 왜 사서 고생을 했을까. 단언컨대 인간은 절대로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그래도 포도밭은 원 없이 봤으니 됐다. 최고의 점심도 먹었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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