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사랑 가득한 항도' 목포의 기독교 유적들
[김이삭 기자]
▲ 목포 양동교회 |
ⓒ 김이삭 |
▲ 목포 양동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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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4년 전, 유달산 너머의 근대역사관을 비롯해 목포의 여러 명소를 방문하기에 앞서 양동교회를 찾은 적이 있다.
사실 신자로서 매주 일요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기에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이 교회를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평범한 교회라 생각하고 무사안녕과 좋은 글을 작성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려는 목적으로 방문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 목포 양동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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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목포성지 옛 광주대교구 역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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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산정동 기념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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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과 똑같이 양동교회에서 잠깐이나마 기도를 하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던 탓에 단념하고 다시 언덕길을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바티칸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1897년에 초기 광주와 전남의 천주교 구심점 역할을 맡았고, 1933년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의 파견으로 인해 광주대교구가 태동했던 옛 교구청이 자리한 산정동 성당이었다.
목포성지 본당의 정식 명칭은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지난 2021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교황에 의해 '준대성전'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곳이다. 다시 말해 서울의 명동대성당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 가톨릭목포성지 옛 광주대교구 역사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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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공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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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곳이 있다. 그것이 바로 목포가 자랑하는 곳 가운데 하나인 공생원이다. 1928년, 앞서 언급한 양동교회의 전도사 윤치호가 어린 고아 7명을 데리고 함께 생활했던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 목포 공생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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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윤학자 여사는 1968년 별세했으나, 그녀 밑에서 자란 네 명의 자녀들은 지금도 어머니를 따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공생원에는 설립 초기에 사용했던 아동숙사를 윤치호·윤학자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윤치호 원장이 난파선으로 지었던 강당과 함께 대반동의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건립한 2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진심과 사랑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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