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사랑 가득한 항도' 목포의 기독교 유적들

김이삭 2023. 6. 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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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삭 기자]

 목포 양동교회
ⓒ 김이삭
군산과 더불어 호남의 대표적인 개항장이라 부를 수 있는 목포는 일제의 수탈기지로서 큰 아픔을 겪었다. 이곳은 호남 기독교 선교의 전진기지이자 구심점 역할을 맡은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1897년 개항과 함께 첫 발을 내디딘 유진 벨 선교사가 세운 양동교회, 아일랜드 천주교 사제들에 의해 세워진 광주대교구와 목포 첫 천주교 본당인 산정동 성당, 그리고 36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배 만행을 속죄하고자 우리나라의 고아들을 사랑으로 품은 '목포의 어머니' 윤학자의 공생원까지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지난달 31일에 이곳들을 방문했다.
 
 목포 양동교회
ⓒ 김이삭
개항과 함께 눈물로 씨 뿌린, 소금과 같은 양동교회

필자는 지난 4년 전, 유달산 너머의 근대역사관을 비롯해 목포의 여러 명소를 방문하기에 앞서 양동교회를 찾은 적이 있다.

사실 신자로서 매주 일요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기에 딱히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이 교회를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평범한 교회라 생각하고 무사안녕과 좋은 글을 작성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려는 목적으로 방문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유달산이 한 눈에 내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이 교회를 들렀을 때, 그곳에서 나처럼 기도하고 계셨던 어느 어르신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격랑의 비극 속에서도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던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목포 양동교회
ⓒ 김이삭
1897년 개항과 함께 유진 벨 선교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며 설립한 '목포교회'로 시작한 양동교회는 1910년에 현 위치로 이전한 이래 지금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더구나 유달산의 석재로 새 예배당을 지을 무렵에 도둑같이 찾아온 일본의 식민지배와 민족말살 정책이라는 거대한 폭풍에도 불구하고 3·1 운동 참여와 박연세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라는 두 개의 사건은 신앙과 민족 정체성을 지키며 몸부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목포성지 옛 광주대교구 역사박물관
ⓒ 김이삭
 
 목포 산정동 기념성당
ⓒ 김이삭
국내 최초의 준대성전 가톨릭목포성지

4년 전과 똑같이 양동교회에서 잠깐이나마 기도를 하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던 탓에 단념하고 다시 언덕길을 올라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바티칸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바로 1897년에 초기 광주와 전남의 천주교 구심점 역할을 맡았고, 1933년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들의 파견으로 인해 광주대교구가 태동했던 옛 교구청이 자리한 산정동 성당이었다.

목포성지 본당의 정식 명칭은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지난 2021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교황에 의해 '준대성전'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곳이다. 다시 말해 서울의 명동대성당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데, 6·25 전쟁 당시 성당을 지켰던 3명의 사제와 2명의 신학생들이 목포로 남하한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어 순교한 비극적인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한 아픔 외에도 전쟁의 참화에 휘말려 안타깝게 희생된 많은 이들을 기리고자 지난 2020년에 이 성당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가톨릭목포성지 옛 광주대교구 역사박물관
ⓒ 김이삭
이뿐만이 아니다. 산정동 성당은 '레지오마리애'라는 이름을 가진, 천주교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봉사단체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발상지이다. 아직 전쟁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3년에 2개의 기초 조직인 '쁘레시디움'을 만들어 첫 주회를 연 것으로 시작된 한국 레지오마리애는 현재 3개(서울, 광주, 대구)의 평의회인 세나뚜스 휘하에 무려 53만 명에 달하는 단원들이 활발히 활동 중에 있다.
현재 광주대교구의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성지 내 옛 광주대교구 교구청 건물에는 광주교구의 역사부터 첫 주회를 재현한 모습을 비롯한 한국 레지오마리애에 대한 것까지 전시 중이므로 한 번씩 찾아가 보길 추천한다(목포성지 역사박물관의 관람시간은 화~일요일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목포 공생원
ⓒ 김이삭
국경을 넘어 끊임없이 샘처럼 솟는 사랑, 공생원

'영원히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을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곳이 있다. 그것이 바로 목포가 자랑하는 곳 가운데 하나인 공생원이다. 1928년, 앞서 언급한 양동교회의 전도사 윤치호가 어린 고아 7명을 데리고 함께 생활했던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이후 그가 키운 아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거지대장'이라 불렸던 그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당시 여학교의 음악교사로 있었던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한국명 윤학자)가 합류한다. 이후 윤학자는 갖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치호와 결혼하여 함께 고아들을 돌본다.
 
 목포 공생원
ⓒ 김이삭
그러나 해방 이후와 6·25 전쟁 당시 갖은 고초를 겪고, 남편이 식량을 구하러 가는 길에 실종되는 아픔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상처받고 버려진 아이들 3천여 명을 사랑으로 키워낸다. 윤학자의 집안이 일본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 집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윤학자 여사는 1968년 별세했으나, 그녀 밑에서 자란 네 명의 자녀들은 지금도 어머니를 따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공생원에는 설립 초기에 사용했던 아동숙사를 윤치호·윤학자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윤치호 원장이 난파선으로 지었던 강당과 함께 대반동의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건립한 2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진심과 사랑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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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isak4703/48)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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