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증 남편과 건망증 아내의 '벨롱벨롱'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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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우 기자]
▲ 광치기 해변에서 본 성산 일출봉 |
ⓒ 최승우 |
여행은 일상의 복잡함과 바쁨을 덜어내기 위한 단순함과 쉼의 시간이다. 아내와 나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일주일이 넘는 제주도 여행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좋아 자가용을 가지고 들어간다.
여행 준비에 아내와 나는 성격 차가 확연히 드러난다.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선호하는 나는 목적지까지 소요 시간에 더해 한 시간의 여유를 두고 출발하는 편인 데 반해 아내는 시간에 쫓기듯 출발한다. 한쪽은 조급함으로 정신없고 또 다른 쪽은 여유로움이 차고 넘친다.
밤 늦게 정해진 시간 안에 당도해야 하는 운전은 긴장감을 더하고 부담스럽다. 새벽 1시에 출발하는 배에 차를 승선하기 위해서는 밤 11시까지 도착해야 한다. 승선 마감 시간 20분 전에 배에 오른다.
차 문을 잠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건망증을 걱정하나 결과를 확인해 보면 까먹은 일보다 괜한 걱정이었음이 허다하다. 하선하려 차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차 문은 잘 잠겨 있었다. 나에게 나이 먹음의 증상은 건망증보다 염려로 나타난다.
이른 하선으로 아침 식사 겸 인근 수산 시장을 방문했다. 아내는 여기저기 어물전을 기웃거리다가 예전에 들렀던 수산 시장이었음을 기억했다. 아내는 나와 달리 세월의 흐름이 건망증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 올레길 리본 |
ⓒ 최승우 |
새벽에 도착한 우리 부부는 원시 수렵 채집인의 유전자와 유목인의 자손임을 증명하듯 한담 해변을 걷고, 협재 해수욕장과 신창풍차해안 도로를 차로 이동한 후 신도 차귀도 구간을 트래킹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얼얼해진 발바닥은 이전보다 빠르게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나에게도 휴식을.'
여행의 묘미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낯선 상황을 경험하는 데 있다. 자구내 포구 차귀도 선착장 주변 야외 공연장에서는 2023 제주 풍파음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제주의 서쪽 고산, 차귀도 섬과 바다를 배경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1박 2일 캠핑과 뮤직 페스티벌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 공연이 진행되는 행사였다.
넓은 바다를 옆에 두고 이국적인 레게 음악이 흘러나오고 한쪽에서는 윷놀이판이 벌어지고 있다. 흥겨운 레게 리듬과 "윷이야! 모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오랫동안 합을 맞춘 듯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잘 어울린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뛰어놀기에 여념이 없고 강아지는 덩달아 짖어댄다. 외국인도 축제에 참여하여 음악에 몸을 맡긴다. 문화와 세대, 동서양 민족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공간이 공존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듯 아름다운 풍경과 화음을 연출한다.
▲ 식당의 플래카드 |
ⓒ 최승우 |
오늘은 올레 7코스와 8코스 일부를 걷는다.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 길은 눈은 즐거우나 긴 거리로 인해 발바닥이 아우성칠 것임은 분명하다.
든든한 아침이 우선이다. 커다란 쟁반 위에 놓인 작은 접시에 반찬이 올망졸망 담겨온다. '산은 산이요, 물과 추가 반찬은 셀프로다'는 식당의 플래카드는 아침 밥상을 즐겁게 한다.
올레길은 친절하게 정방향과 역방향을 표시하고 군데군데 리본을 달아 놓았다. 우리는 리본을 따라 움직이면 된다. 바다 풍경을 감상하고 리본을 찾느라 신체의 모든 부분이 협응해야 하는 오늘이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리본을 찾느라 위로 향한 시선의 후유증으로 다소 거만한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다. 발바닥의 아우성과 뻣뻣한 목덜미를 풀어주는 것은 의외로 트래킹 중 만나는 담벼락에 쓰인 정감 어린 글귀이다.
'꺼벙스럽지만 곱닥한 다육이들을 손말앙 눈과 마음으로 담고 가시민 좋쿠다예~'
▲ 돌담길의 정감어린 글귀 |
ⓒ 최승우 |
가게를 지나는데 이름이 '벨롱벨롱'이다. '작은 별' 노래 가사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에서 나오는 '반짝반짝'의 제주 방언이다. '반짝반짝'의 정겨움도 좋지만 '벨롱벨롱'의 부드러운 어감도 피곤함을 잊게 하는 신선한 자극이다.
거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억척스러움과 4.3사건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진 제주 사람! 담벼락의 글에 담겨있는 따뜻함과 사랑, 위트와 살가운 표현이 제주도가 주는 이국적 풍경을 넘어 입꼬리를 올라가게 한다.
절물 오름, 백약이 오름, 다랑쉬 오름, 거문 오름, 성산 일출봉을 걷는다. 오름을 걷다 보면 제주도만의 독특한 거리 표시를 목격한다. 일반적으로 목적지의 표시는 남은 거리를 적는다.
▲ 거문 오름 탐방길 |
ⓒ 최승우 |
거리 표시의 일반적 기준이 '앞으로 몇 미터 남았네'라는 목표지향적 관점이라면, '출발 지점에서 몇 미터 걸었네'라는 제주도식 기준은 과정 지향적 관점이 아닐까? 단순한 거리 표시의 차이일지 모르지만, 제주도의 거리 표시 방식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수렵 채집인의 후손으로서 제주도 여행은 힘들었다. 힘든 여정에도 담벼락에 적힌 따뜻한 글귀에 힘을 얻었다. 동지애와 인류애로 뭉쳤던 아내와 나는 얼얼해진 발과 함께 부부애를 확인했다. 우리 여행은 '벨롱벨롱', 제주도도 '벨롱벨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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