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의 시선] ‘노키즈존’ 외치는 소아과 붕괴의 현실

주정완 2023. 6. 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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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완 논설위원

‘노키즈존’. 일부 카페나 식당의 어린이 입장 제한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오는 11일로 예정한 학술대회 제목의 일부다. 정확한 명칭은 ‘소아청소년과 탈출(노키즈존)을 위한 제1회 학술대회’다. 소아과를 포기하고 다른 진료 과목으로 바꾸려는 회원들에게 특별한 연수 기회를 제공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아과 전문의들의 소아과 탈출을 노키즈존으로 표현했다. 어린이 진료의 최일선에 있는 이들이 대놓고 노키즈존을 말하는 역설 앞에서 참담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 소아과 탈출 연수에 지원자 몰려
‘미래 없는 전공’에 전공의는 급감
소아 응급 진료 체계 총체적 난국

연수 안내문의 세부 주제를 들여다보면 기가 막힌다. ‘진료실에서 바로 적용하는 보톡스 핵심 포인트’, ‘쪽집게 강의해 주시는 고지혈증의 핵심정리’ 등이 눈에 띈다. 당뇨의 진단과 관리, 비만 치료의 실전 적용 등도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힘만 들고 돈도 안 되는 소아과는 빨리 접고 돈 되는 성인병 관리나 미용시술로 바꾸자”는 얘기다. ‘소아청소년과는 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됐나’라는 특강도 연수에 들어가 있다.

참여 열기도 심상치 않다. 한 소아과 전문의는 “지난달 24일 기준으로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신청자를 세어보니 벌써 650명이 넘었다”고 전했다. 그 뒤 연수 신청자는 더욱 늘었을 것이다. 올해 전국 수련병원에서 모집하려고 했던 소아과 전공의(레지던트) 정원(207명)의 세 배를 훌쩍 넘는다. 실제 소아과 전공의 지원자(33명)는 모집 정원에 한참 모자랐다. 이대로 가다간 몇 년 안에 소아과 전공의는 ‘멸종 위기’에 처할 거란 말까지 나온다.

국내 종합병원 전공의들은 다른 분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장시간 근무에 시달린다. 전공의특별법에 의한 근무시간은 주당 최대 88시간이다. 주당 52시간 초과 근무를 금지한 근로기준법과 엄청난 차이가 난다. 전공의는 근로기준법에 의한 근로자가 아니라 수련 과정에 있는 피교육자로 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주당 100시간이 넘었는데 그나마 개선됐다는 게 이 정도다.

전공의들이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을 포기하고 강도 높은 수련환경을 감수하는 이유는 뭘까. 해당 전공의 전문의 자격을 딴 이후 안정된 생활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아과는 ‘미래가 없는 전공’이란 인식이 퍼지면서 전공의 지원자가 급감하는 추세다. 기존 소아과 전문의가 너도나도 탈출을 위해 짐을 싸고 있는데 전공의 모집이 원활하기를 바라는 게 말이 안 된다.

이제 우리 사회도 소아과 진료 환경의 총체적 붕괴라는 현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초저출산 시대에 어렵게 얻은 아이들의 소중한 생명이 걸린 문제다. 지난 3월 소아청소년과의사회가 ‘소아과 폐과’를 선언한 건 엄살이 전혀 아니었다. 당시 임현택 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지금 상태로는 병원을 더는 운영할 수 없다. 대국민 작별인사를 선언한다”고 말했다. 이후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하는 모습이다.

소아과 진료 공백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40도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던 다섯살 어린이가 지난달 초 서울 한복판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지고 말았다. 당시 구급대원이 다섯 군데 병원 응급실에 문의했지만 바로 어린이 환자를 받을 수 있다고 응답한 병원은 한 곳뿐이었다. 이 병원에서도 입원이 어렵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

이 사건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해명은 어처구니가 없다. 복지부는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전전하다 사망한 것은 아님”이라고 밝혔다. 직접 병원을 찾아갔다가 퇴짜를 맞은 것만 문제고, 전화로 문의했다가 퇴짜를 맞은 건 문제가 아니라는 뜻인지 묻고 싶다. 아니면 병원에서 오지 말라고 해도 환자 보호자가 어떻게든 응급실 문을 밀고 들어갔어야 한다는 말인가.

정부와 여당은 지난달 31일 당정협의에서 ‘응급의료 긴급대책’을 논의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병상이 없는 경우에는 경증 환자를 빼서라도 (중증 환자 병상) 배정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함정이 있다. 소아과 의사가 없는데 병상만 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서울에서도 밤중에 어린이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별로 없다. 심지어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병원인 국립중앙의료원도 소아과 응급 환자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기자가 직접 병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 사항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맞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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