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실학산책] 다산과 추사, 천재였을 뿐인가

입력 2023. 6. 1. 00:53 수정 2023. 6. 1.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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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한국고전번역원은 참으로 큰일을 해냈다. 번역원으로 바뀌기 전 민족문화추진회 때부터 신라 최치원에서 한말에 이르는 유학자들의 문집을 『한국문집총간』이라는 이름의 영인본으로 간행한 일을 말한다. 문집총간으로 350책을 간행하고, 속총간으로 150책을 합해 도합 500책으로 수천 권의 문집을 합본·간행했으니, 우리나라 학자들의 문집 대부분은 그 총간에 실려 있어 한문으로 된 옛날의 문집은 대부분 읽을 수 있게 됐다. 오늘에는 그 문집을 번역하여 계속 간행하여 누구나 옛날 우리 선조들의 글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두 학자
복숭아뼈 닳도록 공부한 다산
붓 천 자루 털 빠지게 쓴 추사
그 열정과 정진이 더욱 그리워

추사 제자인 허련 이 다산 제자인 황상의 일속산방을 그린 ‘일속산방도’. [중앙포토]

나는 책을 읽는 날이 많다. 문집 500책을 꺼내서 읽는 재미로 세월을 보낼 때가 많다. 특히 그중에서도 반계·성호·연암·다산·추사 등 실학자들의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여 읽고 또 읽는다. 다산 책은 안 읽는 날이 많지 않고, 추사의 책도 자주 읽는 책의 하나다. 두 분의 책을 읽어보니 다산은 말할 것도 없고 추사 또한 범접하기 어려운 천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다산과 추사, 누가 뭐라 해도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였음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다산과 추사를 병칭하여 큰 학자이고 대사상가였음을 거론한 내용이 많았다. 다산은 남인 집안 출생이고 추사는 노론 집안 출신으로 둘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었고 고경(古經) 해석에서도 의견을 달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추사는 다산의 둘째 아들인 운포 정학유와 동갑내기로 다산과도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으며, 다산의 두 아들 학연·학유와도 아주 가까운 친구로서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던 기록이 있다.

다산과 추사는 천재였기 때문에 그런 큰 학자로 추앙받는 것일까. 천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에는 다산·추사 못지않은 천재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다산과 추사의 업적에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귀양 살며 얼마나 전심치지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했었던가를 증언해주는 제자 황상이 있었다. 황상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이 학문 연구할 때의 일화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 선생님은 얼마나 오랫동안 방바닥에 앉아 공부만 했기 때문에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려 큰 고통을 겪었다”라고 말했다.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는 사자성어가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의자를 사용하지 않던 시절, 바닥에 발을 밀착해 앉아 있노라면 복숭아뼈가 닳아져, 구멍이 뚫릴 정도로 부지런하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증언이었다.

추사의 평생 친구는 이재 권돈인이었다. 자신보다 세 살 위의 친구, 안동 권씨로 명문의 후예인 데다 같은 당색 노론 출신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낸 고관대작이었지만 추사에 못지않게 서화에도 조예가 깊어 추사의 막역한 벗이었다. 추사문집을 읽다 보면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 수십 통이 있다. 어떤 편지에 “내 글씨에 대해서야 별로 이야기할 것은 없지만, 다만 기억해주실 일은 있네. 내가 붓글씨를 쓰려고 벼루에 먹을 가느라 10개 정도의 벼루가 가운데가 뚫렸고 모지랑이 붓이 다 닳아 털이 없어진 붓이 1000개는 되었네”라고 말해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라는 유명한 글귀가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재라는 사실만으로 최고의 지도자가 되고 큰 학자나 인물이 된다는 사실은 이제 믿을 수 없다. 다산과 추사가 그 정도의 업적을 이룩하기 위해 얼마나 힘든 노력과 땀을 흘렸고 열성과 정성을 바쳤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오래전에 세계적인 천재 에디슨도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과 노력으로 이룩된다”라고 말했지 않은가. 노력하고 땀을 흘린 천재만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데서 알 수 있다.

입학시험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사시나 행시로 공무원을 선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학교에 입학하면 천재이고, 행시나 사시 같은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면 천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데, 그런 일이 얼마나 엉터리 짓인가를 알아야 한다. 머리 좀 좋고 암기능력만 뛰어나면 입시나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

합격한 뒤에 다산이나 추사, 에디슨처럼 피와 땀을 흘리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한 뒤라야 천재라는 호칭이 가능하지, 좋은 대학만 졸업하고 국가고시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천재라 인정받고 고관대작의 직무를 맡는 일은 결코 찬성하기 어렵다. 인격수양에 온갖 정성을 바쳤고 학문연구에 심혈을 기울인 천재가 과연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는가. 뛰어난 천재여서 높은 고관대작이 되었다고 흐뭇하게 생각하는 오늘의 고위공직자들, 다산과 추사의 삶에서 한 수 배우기를 권장해 마지않는다.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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