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원묵의 과학 산책] 구겨짐의 미학
작가가 글을 쓰다가 종이를 구겨 휴지통에 던지는 것은 창작의 고통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만화·영화 등에 종종 나온다. 단순해 보이지만 구겨진 종이는 놀라운 물체다.
종이 한 장을 똘똘 뭉쳤다 펴보라. 크고 작은 주름이 생긴다. 종잇장들을 구겼다 펼칠 때 생기는 주름은 매번 다르다. 개인마다 다른 지문과 같다. 주름의 형성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2차원 종이가 손아귀 안에서 3차원 뭉치로 바뀌기 위해 어딘가 접혀야 하는데 이는 그때그때 임의로 결정된다. 접힌 주름은 가다가 다른 주름을 만나서 크고 작은 주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주름 사이로 볼록하고 옴폭한 종이 면이 생긴다.
전등을 비스듬히 비추어 그늘진 구김살을 보면 입체파 사조의 추상화 같기도 하고 등반하는 암벽 같기도 하다. 분자 단위에서 종이는 이를 이루는 셀룰로스 섬유가 얽히고설켜 만들어졌다.
외부에서 힘을 가하면 섬유가 약하게 붙어있는 곳부터 접히기 시작하고, 이렇게 약한 부분은 종이 안에 무작위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니 주름도 무작위적으로 생기게 된다.
종이가 찢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찢어지는 끝에서 섬유가 약하게 붙은 쪽이 선택되어 그 경로가 매번 다르다. 찢어진 선을 가만 들여다보면 바닷가의 해안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이의 구김살과 암벽, 찢어진 종이와 해안선은 단순 비유가 아니다. 형성과정이 물리적으로 비슷해서다. 파도가 부딪히는 해안과 암벽 둘 다 약한 부분부터 떨어져 나가며 생긴 형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현상에 관련된 물리 이론을 모르는 일반인도 유사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자연을 반영한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맑은 날 하늘의 구름을 보며 온갖 모양을 상상하듯이 집에서 답답할 때 종이 한 장 구겼다가 펼쳐 놓고 응시만 해도 자연의 심오함과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미국 텍사스 A&M대 생명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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