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 ‘정치화한 전기요금’의 부메랑

하현옥 2023. 5. 3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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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조원 적자에 빚더미 오른 한전
자금 블랙홀에 무역적자도 부추겨
전기요금 인상만이 유일한 해결책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시장의 논리는 차갑다. 정치의 논리는 뜨겁다. 정치와 시장이 맞붙으면 일단 정치가 이기고 보는 이유다. 이른바 포퓰리즘이 힘을 받는 까닭이다. 냉정한 계산서는 뒤늦게 찾아든다. 면피가 만연하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어쭙잖은 희생양’ 만들기도 벌어진다. ‘정치화한 전기요금’의 상황이 딱 이렇다.

건전한 공기업이던 한국전력(한전)이 ‘적자 공룡’이 됐다. 2021년부터 누적된 적자만 44조7000억원에 달한다. 올해 1분기 영업적자만 6조2000억원에 이른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전기요금 때문이다.

한전은 발전자회사에서 전력을 사와서, 자체 공급망을 통해 기업과 가정에 공급·판매한다. 한전의 총괄원가 회수율은 65% 정도다. 전기를 1000원에 사와서 650원에 팔고 있다는 말이다. 올해 1분기 한전의 kWh당 전력 구입 단가는 174.0원, 판매 단가는 146.6원이다. 팔수록 적자다. 그나마 지난해 말 올해 1분기 kWh당 요금을 13.1원 올려서 줄어든 게 이 정도다.

팔수록 손해인 전기요금은 ‘뜨거운 정치’의 산물이다. 문재인 정부의 탈(脫) 원전 정책으로 발전 자회사는 원가가 싼 원전의 비중을 낮추고, 원가가 비싼 LNG와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발전을 늘렸다. LNG와 신재생 에너지의 발전단가는 원자력 발전의 4~5배 수준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급등한 에너지 가격도 원가를 끌어올렸다.

시장의 논리였다면 원가 상승에 따라 전기요금도 올리는 게 맞았다. 하지만 ‘뜨거운 정치’는 다른 길을 택했다. 탈원전이 수반하는 비싼 전기요금은 용납할 수 없었다. ‘값싼 전기’에 길들여진 이들의 저항도 부담스러웠다. 전기요금 인상 대신 한전에 빚을 내도록 등을 떠밀었다. 여야는 한전채 발행 한도를 기존 적립금·자본금 합산의 2배에서 5배인 약 104조원으로 크게 늘렸다.

늘어난 채권 발행 한도 속 한전은 계속 빚으로 버텨왔다. 지난해 한전이 발행한 채권만 37조2000억원에 이른다. 올해 들어서도 10조3500억원의 채권을 발행했다. 순식간에 불어나는 빚에 5월 초까지 발행한 한전채(약 77조원)는 발행 한도의 75%를 이미 채웠다. 올해 1분기(1~3월) 한전이 부담한 하루 평균 이자비용은 약 70억원이나 된다.

「 45조원 적자에 빚더미 오른 한전
자금 블랙홀에 무역적자도 부추겨
전기요금 인상만이 유일한 해결책

이런 분위기 속 한전은 지난 12일 25조7000억원 규모의 자구안을 발표했다. 지난 2월 발표한 재정건전화 계획(20조1000억원)에 5조6000억원 규모의 자구책을 더했다. 여기에는 자산 매각과 임대, 임직원 임금 인상분 반납, 전력 송·배전망 유지·보수 예산 조정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 자구안, ‘정치화한 전기요금’의 희생양 만들기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전 영업비용의 90%를 차지하는 구입전력비의 충격을 완화할 전기요금 현실화 방안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미봉책에 불과해서다. 발표대로 한전 임직원의 임금 인상분(약 200억원)을 반납해도, 한전의 사흘 치 이자를 메우는 데 그칠 뿐이다. 게다가 전력설비 건설 시기와 규모 조정은 전력 산업 생태계 훼손과 전력 설비 부실과 노후화로 인한 국가 재난 사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정치화한 전기요금’은 한전의 체력 고갈로 그치지 않는다. 각종 부작용과 시장의 왜곡을 만들어낸다. 높은 신용등급에 상대적으로 고금리를 주며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한전채가 ‘국민채’로 등극하며 한전은 이미 자금을 빨아들이는 금융시장의 블랙홀이 됐다. 자금이 한전채로 쏠리며 돈을 빌려야 하는 기업은 더 높은 금리를 줘야 하고, 은행 대출 금리 등도 덩달아 오른다.

그뿐만 아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전기요금을 올리면 물가는 당장 상승하지만, 요금을 인상하지 않으면 한전의 적자가 커져 금융시장에 한전채가 나오고 에너지 소비가 확대돼 무역적자가 커짐으로써 환율에도 영향을 주는 여러 측면이 있다”며 “불가피하게 전기료를 정상화하는 것이 여러 효과를 고려하면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 전기요금 인상은 내키지 않는 선택지다. 하지만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당장 고통스럽다고 병증에 대한 치료를 미룬다면 정말 수술이 어려운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 ‘싼 전기’에는 ‘비싼 세금고지서’가 숨어있다. 지금 오른 전기요금을 받아들일지, 밀린 이자까지 붙은 세금 폭탄을 맞을지, 힘들어도 이젠 결정할 때다.

하현옥 경제산업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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